▲ 내 앞에 떨어진 밤
밤송이까지 찍었으면 좋았을 걸... 급히 열어 보고싶은 마음에....
명절 의식을 치루고 난 후 밀려오는 한가함 속에는 언제나 쓸쓸함이 가득했다.
올 해도 매 한가지였지만
또 다른 하나가 더 버무려진 쓸쓸함은 허허롭기까지 하다.
추석 날 오후,
살금살금 뒷산을 올랐다.
정답고 익숙하던 길이 문득 낯설게 느껴짐은?
아마도 길섶의 무성한 잡초들이 정리되어 그럴 것이라고 애써 마음잡아 본다.
오솔길 옆 산등성에는 밤송이들이 유난히 많이 떨어져 있다.
작년 이 맘 때 처음으로 밤을 주워보면서 느꼈던 충만함에
여기 저기 떨어진 밤송이들을 발로 툭툭 차 보았지만 모두가 빈 송이들이었다.
오늘은 추석날, 명절 치르느라 산에 오르는 사람들의 발길이 조금 뜸했을까
간혹 알맹이만 떨어져 있는 밤들이 있었으니 참으로 통통하고 야무진 밤알이었다.
그냥 그렇게 눈에 보이는 밤들 몇 개만 주우며
오솔길을 걸어 내 반환점까지 가서 되돌아 왔다.
걸으면서도 눈길은 자꾸 땅만 바라보게 되니
눈을 들어 문득 마주치는 오솔길이 자꾸만 낯설게 보이는 것이었다.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오른다.
만약 지금 내 눈 앞에서 떨어지는 밤송이를 만난다면
그 밤송이에 내 아픔의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얼른, 만약 만나지 못한다면? 하는 두려움에 고개를 절로 저었지만
이미 생각으로 내 생각을 말해버렸거늘…
지금 내가 한 생각은 想, 思, 念, 慮, 어느 것일까.
다 같은 생각을 나타내는 한자어지만 뜻은 다르다.
내 눈앞에서 밤송이가 떨어진다면? 하고 떠오른 생각은 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思)하지 않았기에 내 생각은 염려(念慮)가 되어 버렸다.
떨어지는 밤송이를 만나지 못하면
난 아픔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기쁨과 희망은 모두 내 안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내 희망을 밤송이가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밤송이를 매개체로 나는 희망을 내 안에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니
밤송이에 내 마음을 걸면서 기쁨과 희망을 저울질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우를 범하고 말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
이렇게든 저렇게든 나에게 닥친 일들에 기쁜 마음의 자세로 임해야겠다며
에둘러 마음잡으며 오솔길을 다 내려오는 마지막 내리막길에 이르니
무언가가 우두둑 탕탕 떨어진다. 밤송인가? 맞다. 밤송이가 떨어졌다.
하지만 우거진 낙엽 덤불 속, 숲 깊은 곳에 떨어지니 찾을 길이,
아니 찾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냥 내려오는데
또 하나가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더니
내 앞길을 지나 저 아래로 굴러 가는 것을 눈으로 쫒았다.
아! 드디어 떨어진 밤송이를 만났다.
아직은 약간 푸른빛이 짙은 밤송이가 입을 자그맣게 열고 있었고
얼른 막대기를 집어 벌려보니 딱 한 알의 통통 여물은 밤이 들어 있었다.
어찌나 좋은지!!
마치 내 속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듯, 밤송이는 내 염려를 덜어준 것이었다.
그것도 마지막 내리막길이었으니 은연 중 바라던 희망에 낙심을 하려던 찰나였다.
10월 한 달에 행해야하는 어렵고 힘든 나의 일정에 서광을 보내준
밤송이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힘든 일에 임하는 마음이야 두려움이 있지만 낙담할 일은 결코 아니다.
무언가에 마음을 걸어두는 일은
내가 일어설 수 있는 크나큰 힘을 안겨주는 버팀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는 절실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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