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계서당
마실길 걷기를 마치고 돌아오니
남편은 나더러 체력이 많이 나아졌다며 좋아한다.
차를 출발시키기 전
‘반계 유형원 유적지 가보고 싶어 했지?’ 하며 묻는다.
언젠가 내소사에 다녀오며 길 한 곳에 세워진 유형원 유적지라는 이정표를 보고
저곳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던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반가움에 얼른 대답하고 방향을 잡았다.
지금의 위치에서 30분쯤 가면 나온다고 내비가 알려준다.
학창시절에 배우고 절대 잊히지 않는 이름 중 한 명이 반계 유형원 선생이다.
실학자이며 반계수록이란 책을 지은 사람이라고 참 무던히도 외웠던 것 같다.
반계 유형원선생은 다른 실학자들에 비해 그리 유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연암 박지원 선생은
‘많은 능력이 있으면서도
바닷가에서(부안을 뜻함) 소요하고 있다’ 고 언급하며 안타까워했으니
그 당시에는 꽤나 실력을 인정받는 분이셨던 것 같다.
선생이 지으신 반계수록의 내용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교과서에서 배울 정도의 책이라면
내용은 학문적, 교육적 가치가 충분할 것이라고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짐작은 유적지를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이어주니 그나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유적지에 도착했지만 갓 형태의 화장실만 덩그마니 있을 뿐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니 어느 밭 모서리에 반계서당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보인다.
그 방향을 따라 가니 커다란 돌에 새겨진 실사구시의 비석이 나타난다.
비석을 조금 지나 데크 길이 나 있었다. 300m 더 올라가야 한단다.
휴!! 순간 걱정이 앞선다. 내가 갈 수 있을까?
마음이 육체를 이기는 법,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데크길을 따라 올랐다.
중간 중간 실학에 대한 설명을 적은 푯말들이 있으니 공부를 하며 올랐다.
데크길이 끝나고 돌과 시멘트로 다듬어 놓은 가파른 길이 나타난다.
점점 힘이 든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르막을 올랐다.
다리의 힘이 빠지는 걸 느꼈지만 내심 숨기며 걸었다.
그 옛날 그 시절 이런 깊은 산 속에 서당이 있었다니!!
반계 선생이야 세속을 피해 왔다지만 공부하러 여기까지 오르내린 학생들은?
참 어려운 공부를 했구나 싶은 마음에 공부에 대한 어려움이 새삼 차오른다.
길가의 잔잔한 꽃들과 눈 맞춤하며 오르다 보니
잘 자란 소나무의 우뚝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곳일까? 하는데 정자가 보인다. 아, 드디어 도착했다.
정자에서 바라본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곳에서 선생은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셨을까.
그 마음을 후손들에게 일러주셨을까?
반계서당 안으로 들어서니
아담한 돌담이 예스러움을 간직하며 정갈하니 참으로 아늑하다.
문안과 문밖, 두 곳의 우물마저 그 어떤 기운이 서려 있는 듯싶으니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서당 건물은 복원된 건물이지만
이곳에서 반계수록 26권을 지으셨다니 과연 이 자리가 좋은 곳임은 분명할 터,
역사적으로 길이 보존함이 지극한 일일 것이다.
서당을 나오니 묘 터 가는 길의 표지판이 또 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또 다시 오르막길이다.
망설여졌지만 내친 김에 다녀오자는 마음으로 천천히 또박또박 걸음을 옮겼다.
무성한 칡덩굴이 길을 가로지르며 뻗어 나가고 있었다.
사람 흔적 드문 곳을 점령한 칡덩굴에 잠시 무서움이 일었지만
가느다란, 연한 줄기를 바라보니 순간 정겨움이 번진다.
한 고비를 돌아 오르니 묘 터가 나온다.
이곳은 임시로 모신 곳이고
후에 경기도 용인 선산으로 옮겼다는 낮은 안내 표시석이 있었다.
탁 트인 풍경이 정말 좋았다.
가묘에는 크나큰 망초가 제 세상 만난 듯 자라고 있었으니
한 번 손질을 해 주었으면 싶은 마음 간절하였다.
편안한 마음으로 내려오는 길에
오를 때 만나지 못했던 꽃들과 밤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밤송이가 어찌나 크고 튼실한지
올 추석에는 정말 풍성하겠다는 생각에 내 마음도 풍요로워진다.
주차장에 당도하니 이제야 허기가 진다.
문득 아픔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배고픔이라 생각하니
이 또한 반갑기 그지없다.
상사화를 만나고 아름다운 길을 걸었고,
또 유형원선생 유적지를 둘러보았고,
그에 덤으로 배고픔까지 느낄 수 있었으니 참으로 뜻 깊은 하루였다.
▲ 등골나물
▲ 산박하
▲ 층층이꽃
▼인용글
#. 흉년과 기아, 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그는 권세를 지키기에 급급한 벼슬아치들과, 고통 받는 농민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고담준론(高談峻論)하는 유식자들을 비판하였다. 이후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선비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고, 당대의 권세가들이 권유하는 벼슬도 마다하였다.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양반의 권위가 실추되어가는 시대에 과거급제해서 벼슬하지 않으면 사람다운 대접도 못 받고 생활 수단도 마련하기 어려운 시대였기에 그의 결단은 비장한 것이었다.
소란하고 시끄러운 서울을 떠나 산이 아름답고 강이 푸른 우반동에는 거기에 평야가 널려 있어 삶도 궁핍하지 않았기에, 평생을 마칠 계획으로 부안으로 낙향한 유형원은 ‘부안에 도착하여’(到扶安)라는 시 한 수를 읊는다.
“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 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
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씨고 / 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
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 / 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
모래 위 갈매기 놀라지 않고 날지 않으니 / 저들과 어울려 함께 하며 살아야겠네.”
이후 변산의 산자락에 ‘반계서당’을 짓고 성리학과 실학사상 연구와 농업,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 등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32세에서 49세까지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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