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혼신을 다한 봉정암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도 내 나름의 무언가를 희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시간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아이러니함도 있었다. 내 남은 생에 언제 다시 찾아 올 수 있을 것인가. 그냥 뿌듯함이 꽉 차 오른다. 깊고 높은 산속에서도 제 모습을 잃지 않고 피어나는 꽃들을 대하노라면 예쁘다하는 감정보다도 그들은 나에게 알 수 없는 희망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은 무언가를 지니고 있음을 느끼곤 하였다. 힘들고 지칠 때 그들은 힘내라고 격려해주는 그런 활력소였기에 더욱 반가움으로 대했던 것 같다.
다시 소청봉에 올랐다. 한결 개운하고 무언가를 해 냈다는 뿌듯함이 있다. 다시 한 번 소청봉의 아늑함을 가슴 가득 담고서 중청을 향했다. 능선만을 타고 걷는 편안함은 지금까지의 힘듦에 대한 보상을 해주기라도 하듯 환하게 펼쳐지는 풍경에 절로 마음이 시려온다. 바위와 나무의 조화, 바람과 하늘과 구름의 변화무쌍함은 무한한 공간을 하나의 아늑한 공간으로 꾸며주는 요술쟁이 같았다.
중청 등허리를 가로 질러 돌아드니 저 아래 중청대피소가 보인다. 멀리 보이는 대피소의 몸짓이 참 중후하다. 오늘 내가 잠을 자는 곳이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바람이 세차다. 이상하게 몸에 자꾸만 한기가 돈다. 대피소부근의 낮은 곳에는 얼레지와 노랑제비꽃이 지천이다. 3시 38분에 중청에 도착했으니 봉정암에서 부터 이곳까지 1시간 30분정도 걸었다. 안내도에 표시된 시간과 거의 일치하는 시간이었다. 산에서의 1km 는 평지의 3km만큼의 거리라 하니 오늘 참 내가 대단한 일을 해 냈나 보다. 대피소 입실시간이 남았기에 곧장 대청봉에 올랐다.
남편은 기다리다 이미 먼저 오르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만약 저기 대피소 의자에 조금 앉기라도 한다면 더 이상 일어날 힘이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대피소를 지나쳐 대청봉을 향했다. 몸이 추워지면서 힘이 드니 자연히 걸음이 무겁다. 그렇게 걸으면서도 후후 웃음이 나온다. 나 혼자 상상하기를 대피소에서 대청봉 오르는 길은 숲이 우거진, 그래서 길 찾기 어려운 곳이 아닐까하며 혼자 상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잦고 기온이 낮은 이곳의 식물들의 상태는 모두 키 높이가 사람 무릎 정도일 뿐이었다. 캄캄한 밤에도 눈감고 오를, 그런 길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걸은 뒤의 발걸음은 힘겹기만 하다. 이곳은 아직도 봄이었다. 진달래가 가득 피었고 추운 곳이지만 튼튼하게 잘 자란 눈잣나무의 어울림이 참으로 환상적이다. 낙원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바람은 자꾸만 나를 움츠리게 한다.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바위틈만을 기웃거리는 마음이 되었다.
눈앞에 대청봉 표시석이 보이는가 싶은데 남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듯 반가웠다. 평일인데다 입산통제 해제 첫날이어서인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표시석과의 인증샷이 수월하였다. 덕분에 1,708m의 높이에서 천천히 바다를 바라보고 둘레둘레 살펴보며 대청봉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였다.
▲ 대청봉에는 표시석이 많기도 하였다
모두의 옆에 서 있어 보고 싶었지만
찬 바람이 너무 심해 나의 머리만 휘둘리고 말았다.
▲ 중청대피소가 보인다.
오늘 내가 잠을 자는 곳이다.
▲ 이제 막 멍울을 맺기 시작한 이 나무는???
▲ 대청봉을 오르다 뒤돌아 바라본 대피소
▲ 대청봉 부근의 주목
▲ 대청봉은 봄이다!!
▲ 대청봉에 자생하는 눈잣나무
눈잣나무는 평지에서는 곧추 자라지만 산꼭대기에서는 누워 자란다고 한다
하여 누운잣나무에서 파생된 '눈잣나무' 라는 이름이란다.
다시 중청대피소로 내려왔다. 입실은 6시부터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벌써 웅성거리고 있다. 하기야 정원이 120명인데 꽉 채운 예약인원들이 오죽할까. 대피소 주변을 둘러보는데 빨간 우체통이 마음을 끌어간다. 이 우체통을 이용하리라 다짐해 본다.
물이 없으니 씻는 것은 물론 양치질도 할 수 없단다. 다만 대피소에서 판매하는 생수를 사서 라면정도는 끓여 먹을 수 있다. 추워서인지 조금 이르게 입실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예약자임을 확인한 후, 한 사람 당 담뇨 두 장씩을 대여 해 주었다. 장당 2,000원의 대여금을 내야 한다. 담뇨를 받아들고 대피소 자리를 배정 받고 식사를 하러 취사장에 내려갔지만 나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이상스레 몸이 춥기만 하니 이 상태에 무얼 먹으면 체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다. 내일 내려가지 못한다면 큰 일이 아닌가!!
추운 나를 위해 남편은 담뇨 2장을 더 대여해 준다. 담뇨로 몸을 둘둘 말아 대피소 침상에 일찍부터 누웠다. 생각 같아서는 대피소 주변을 마음껏 배회하고 싶은데 추워서 할 수가 없었다. 대피소는 전체를 9시에 소등하였다. 비상구 불빛만이 마치 스탠드 불빛처럼 실내를 밝혀준다.
사람들은 대부분 질서를 잘 지켜 주었다. 아마도 오늘은 평일이어서 산악회 단체 손님이 없어서일 거라고 나름 짐작해 본다. 모두들 고단한지 일찍 잠들을 잤고, 나는 중간에 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는데...어두운 곳에서 혼자 웃음을 참지 못하기도 하였다.
여기저기서 ‘아이고 다리야’ 하는가 하면,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기도 하니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여기저기서 방귀를 뀌곤 하니 웃음이 나온다. 대피소 방이 3개니 한 방에 40명 씩 잠을 자는 것이니 오죽할까. 밤 12시 조금 넘어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와 보았다.
야경을 바라보고 싶어서다. 속초시내의 아스라한 불빛이 애잔하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차갑고 세찬 바람은 1분도 나를 버티지 못하게 한다. 그냥 다시 들어와 자리에 누웠다.
새벽 3시 경부터 여기저기서 부스럭거리기 시작한다. 일찍 배낭을 메고 나가는 사람들은 어느 행선을 가는 사람들일까. 우리도 4시 30분에 행장을 꾸려 나왔다. 5시 14분의 일출을 보고 곧바로 오색 쪽으로 하산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대청봉을 또다시 오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출을 보러 나왔고 이미 올라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 중청대피소의 우체통
▲ 대피소 내부
▲ 중청대피소 취사장
▲ 중청대피소에서 바라본 한 밤중의 속초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