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다. 직원들이 모두 외출을 하니 혼자 덩그마니 남게 된 시간! 무슨 선물이라도 받은 듯 풍요로운 마음이다. FM방송에서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협주곡의 선율이 애잔함을 안겨주며 흐르니 뜻하지 않은 한가로움에 무엇을 할까 두리번거리다 책을 펼쳐든다. 주어진 한 시간 중 어느새 5분이 흘러갔다. 알차게 보내야지 하는 든든한 마음으로 책읽기에 몰두하노라니 잔잔한 음악과 함께하는 참 좋은 시간임에 절로 차분해진다.
이 좋음을 만끽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린다. 업무상 전화일까 싶어 수화기를 드니 ‘귀하의 전화요금이 연체되어… 어쩌고저쩌고’ 콧소리가 들려온다. 낭패다. 좋았던 기분이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현대를 살아가면서 고요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삶의 여정 중에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는 일처럼 중요한 일이 있을까.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시간을 만들 수가 없다. 나는 고요하고자 하나 주위의 사물들이 가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택에 가면 “반일정좌 반일독서”라는 주련이 걸려있다고 한다. 하루의 반은 바르게 앉아있고 하루의 반은 독서를 한다는 뜻이라니 미처 그 행위를 하기도 전에 내 안에 고요함이 밀려온다. 고요함속에서 나에게 묻고 스스로 걸러지는 답을 듣는 것처럼 귀함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그 시간을 만날 수 없다. 그 귀함을 알기에 우리 선조께서는 집안 기둥에 글씨를 써서 걸어두고 행하셨을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매일 하는 새벽산행은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다. 고요가 가득 퍼져 있는 이른 산속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침묵으로 정진하는 시간이다. 고요가 뿜어내는 적막감은 두려움이 아닌 친근함과 경외감으로 나를 휩싸니 절로 침묵으로 저어 나가는 시간이다. 춘분이 지난 요즈음, 뜻밖에 그 고요함을 나와 함께하는 친구가 있으니 호랑지빠귀 새다.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긴 울음으로 숲의 정적을 흔들곤 하지만 결코 요란스러운 울음이 아니다. 새의 긴 울음으로 숲의 고요함은 더욱 깊어진다.
올 봄 들어서 처음 듣는 새의 소리는 낯설음에 배인, 조금은 힘이 없는 소리였다. 나는 짐짓 새의 울음소리를 대화처럼 알아듣는 척한다. 여름 가을 겨울동안 어디서 지내다 왔을까. 긴 공백의 어색함에 우는 소리는 그렇게 조심스러웠다. 며칠 지난 요즈음에는 숲의 식구들과 많이 친해졌는지 울음소리가 제법 굵고 힘이 있다. 어느새 제짝과 울음소리를 주고받으며 서로 즐겨하니 우리 뒷산이 너른 마음으로 새들을 반겨하는 것 같다.
이제 막 봉오리를 맺기 시작한 진달래들은 새소리를 들으며 무언가 따라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인다. 연둣빛노랑의 생강나무 꽃은 한껏 자태를 뽐내며 제 빛을 여한 없이 발하고 있다. 개암나무 수꽃들은 아주 미세한 바람에게도 제 몸을 맡겨 흥을 돋우고 있다. 그 흐느적거림이 조금은 징그럽지만 부지런함으로 봄을 불러주는 기특함이 대견하기도 하다.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침묵으로 정제한 그들의 몸짓 언어를 소리로 들을 수 있다는 믿음에 참으로 충만한 시간이다. 나의 내면에서는 저절로 내 안의 소리를 내며 그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비록 내 허물 많아 내 모든 것을 잃었을지언정 그들은 스스로의 몸짓 언어로 나를 잡아주곤 한다. 그에 나의 행동과 말을 누구의 간섭 없이 돌아볼 수 있고, 엉긴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의 잘못을 채찍질 할 수 있다. 침묵으로 전하는 그들의 언어는 진리에 이르는 거스를 수 없는 섭리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힘이다.
바쁜 시간 속에서 나를 고요케 하는 것들을 만날 수 없다함은 핑계일 것이다. 독서와 음악과 자연 속에서 깨달은 주련 하나 내 마음기둥에 걸어두면 언제든 침묵으로 나를 만날 수 있다. 침묵의 언어로 봄을 만드는 자연처럼 내면의 침묵을 키워가며 충만함으로 채워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가만히 소망해 본다. (1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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