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장마 못지않은 비가 한차례 지나갔다. 황사가 들락날락하더니 아마도 봄 햇살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겠는지 물러난 듯싶다.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나뭇가지에 앉은 햇살이 반짝거린다. 아니 햇살을 받은 새잎들이 유난히 반짝인다.
꽃이 진자리를 아물게 해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꽃 진 자리에서 피어나는 연둣빛 잎들은 나뭇가지를 채워주고 있다. 돌보는 손길 없이도 스스로 비우고 스스로 채워가는 몸짓이 신비롭기만 하다. 연둣빛 새잎들의 부드러움은 꼭 아기 손과 같다. 주먹 쥔 자그마한 손을 바라보며 혼자 옹알이하는 아기 모습 같아 귀엽다.
내 마음을 온통 빼앗아 가는 연둣빛 잎 곁에서 걷노라면 온 마음이 연둣빛이 되어 행복하다. 그들은 작은 차이가 있을망정 각기 나름대로의 다른 빛을 지니고 있다. 같은 연둣빛이라도 약간의 색감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나름의 색으로 서로 다른 열매를 맺기 위한 창의성이라 말하고 싶다. 그 중 유독 달리 보이는 잎은 감나무 잎이다.
다른 나무들의 새잎이 밝은 연두라면 감나무 새순은 약간 갈색을 머금은 빛을 띠고 있다. 난 그 색감이 너무 좋다. 감나무 줄기는 검은빛이다. 그 검음을 잎이 닮아서 일까? 밝은 연두에 살짝 검정물감을 섞어 놓은 듯싶은 감나무 새잎에서 나는 고상함을 느낀다. 감나무만이 지닌 고품격처럼 느껴지는 연유는 아마도 빨갛게 물들어 열리는 감의 색깔을 연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감이 지니는 선홍색 빛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하던 즈음, 우리 집 뜰에는 감나무는 두 그루가 있었다. 감이 익을 무렵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감을 줍는 재미에 늦잠을 잘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나는 화들짝 눈이 떠지는 기쁨을 만났다. 큰 감 하나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떨어질 때의 충격이었을까 살짝 생긴 금 틈으로 보이는 속살의 선홍색이 너무 고왔다. 손에 담아 조심스레 걸어오던 나는 그만 밭고랑을 헛디디고 넘어지고 말았다. 먹을 수 없었음은 물론 흙에 묻힌 그 선홍색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그 아쉬움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토록 애잔한 아쉬움을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잡았다 놓친 그 선홍빛은 언제나 그리움처럼 내 마음 안에 살아 있기에 감나무의 새잎마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에움길을 돌아 나오는 길에서 오늘 만난 감나무는 더욱 잎을 키우고 서 있다. 유독 내 마음이 끌리는 까닭일까. 유난히 돋보이는 감나무에 자꾸만 눈길이 머문다.
나란나란 서있는 나무들의 모습에서 음률이 흐르는 듯싶다. 아, 그들은 서로 간에 서로의 빛으로 봄을 연주하는 교향악단인지도 모르겠다. 그 중 감나무는 유독 키가 크니 콘드라베이스라 할까. 작은 나무들이 잔 몸짓으로 움직일 때 키 큰 감나무는 의젓하게 서 있다. 바람이 스쳐 지나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듯싶다. 언제 바람을 조율하고 햇살을 켜야 하는지 기다리는 마음은 얼마나 긴장이 될까.
우리 작은 아이가 중학교 때 음악부에서 콘드라베이스를 배우는 계기가 있었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결과 음악부 아이들이 시민문회회관에서 발표회를 갖는 날, 나는 자랑스러움을 안고 연주회 관람을 갔었다.
키가 큰 내 아이는 키가 큰 콘드라베이스를 껴안듯 잡고 서서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악기들이 쉴 틈 없이 연주할 때 내 아이는 언제인가 나오는 연주 순서를 기다리며 긴장하며 서 있었다.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지금 얼마만큼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지 바라보는 내가 땀이 났었다.
다른 악기들은 처음부터 연주에 들어가니 리듬을 자연히 타겠지만 콘드라베이스는 어쩌다 한번 그 틈을 타고 들어가야 한다. 그 틈을 기다리면서 쉼 없이 연주하는 악기들과 어우러지기 위해 속으로 수없이 음을 따라 리듬을 살리고 있었을 것이다. 연주 내내가 아닌 중간에 한 번씩 들어가 다른 악기들의 연주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내 아이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아이는 의젓하게 잘 해 내었고 선생님으로부터 계속 연주 공부를 하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나는 내 아이의 그런 감성이 참으로 좋았다. 제 차례를 기다리기 위해 참아야했고 그 리듬을 깨트리지 아니하려 긴장을 하고 서 있었던 아이의 모습이 지금 저 감나무에 오버랩 되는 까닭은… 더 좋은 선홍빛 감을 맺기 위해 더 유별한 색으로 제 잎을 반짝이고 있음일 것이다. 긴 겨울을 지나는 동안 한 눈 팔지 않고 싹틔울 봄의 연둣빛 리듬을 타기위해 정진하였을 것이다. 조금은 고품격을 지니면서 고상한 빛을 발하는 감나무의 여정에서 우리 아이의 희망을 걸어 보는 일, 이 또한 이 봄이 아니면 잡을 수 없는 내 마음의 명상 음악연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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