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맣고 통통함은 귀염성을 지니고 있다. 귀여운 것들을 바라보노라면 내 안의 모든 것이 무장 해제되는 느낌이 마냥 좋기만 하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표현하는 순수함을 지녔기 때문이리라. 푸르른 여명 빛이 점점 제 빛을 놓아가며 햇살을 받아들이는 시간, 나는 그렇게 귀염성에 내재된 정겨움에 이끌려 길가에 쪼그리어 앉고 말았다. 그 날렵한 몸매를 왜 포기했을까. 뭉툭함으로 피어있는 까치수영에 그만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정말 귀여웠다.
어제 밤부터 내리는 빗줄기에 그나마 몸을 말끔히 씻은 듯, 잎의 청초함이 그동안 가뭄에 견뎌온 노고를 함께 씻어냈음을 말해주고 있다. 혼자만의 한 생각에 머문다. 이 까치수영은 가뭄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으로 제 몸의 부피를 줄였는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자연의 섭리에 스스로 제 몸의 변화로써 대응한 뭉툭한 까치수영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자연적 예술은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질서로 예술을 빚어내면서도 다만 내게 주어진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는 일은 내가 존재해야 할 전부라고 알려주고 있다.
귀여운 까치수영의 모습이 자꾸만 나를 미소 짓게 한다. 토요일이어서 조금 이른 퇴근을 하고 우산을 챙겨들고 다시 산을 올랐다. 다행히 산 초입에서 10 여분 정도만 걸으면 되는 곳에 그 까치수영이 있기에 새벽보다는 조금 밝은 빛 아래서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를 맞은 온 숲이 촉촉한 기운을 내 보내고 있으니 참 좋다. 여기저기 해찰을 하며 발맘발맘 걸어 까치수영 있는 곳에 도착한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새, 단지 11시간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까치수영은 꽃을 다 떨치고 몇 송이만 달고 있었다. 어쩜! 이건 말도 안 돼! 하면서 나도 모르게 크게 말하고 말았다. 꽃을 다 떨치고도 싱싱한 얼굴이었다. 그랬다. 아침 9시부터 강풍이 불었었다. 출근길 주차장 까지 걷는데도 우산이 뒤집어질 정도의 강풍이었다. 강풍은 그렇게 오전에 서 너 시간 계속 되었다는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 강풍에 이렇게 꽃이 떨어졌나보다 생각하니 콧등이 시큰하였다.
그제야 주위를 다시 바라보니 숲은 커다란 몸살을 앓고 있었다. 가뭄에 힘없이 달려있었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커다란 오동나무 잎들은 오솔길을 포장하듯 덮고 있었다. 자귀나무의 예쁜 꽃이 물에 씻긴 붓처럼 축 쳐져 있었다. 그렇구나. 자연에서 자연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또 다른 자연의 섭리에 이토록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구나. 험한 바람에도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이토록 순수함을 느낄 수 있다니… 까치수영의 모습에 그만 마음이 찡해온다. 이들의 모습에서 삶의 가치를 느껴본다.
살아있는 것들의 삶이 소중함은 고통의 어둠으로 보이는 죽음이라는 명제가 뒤따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꼬리 없는 까치수영으로부터 새롭게 깨달음을 얻으며 병실에 누워있는 형님(동서)을 생각했다. 우리와 나이차가 많아 시부모님처럼 여겨온 큰 형님은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건강하게 살아오신 분이셨다. 몇 해 전부터 가끔 병원을 왕래하시더니 급기야 이렇게 입원까지 하신 것이다.
문병을 간 날, 형님께서는 링거를 꽂고 안색이 형편없는 얼굴로 누워계셨다. 아, 그런데 환자복 사이로 나와 있는 발에는 분홍색 꽃 양말이 신겨 있었다. 그 모습에 웬일인지 편안함이 밀려왔다. 환자면 아픔에, 그것도 느닷없는 아픔이라면 황당해하며 놀라고 정신없는 표정이어야 하는데 형님은 발에 꽃양말까지 신고 계셨던 것이다.
물론 평소에도 맨발로 다니시지 않고 늘 예쁜 덧버선을 신고 계시긴 했지만, 지금의 당신이 처한 상황을 그저 일상과 똑같이 여기시려는 심정이심을 꽃양말이 대신 전해주고 있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제 받아들이시겠다는 마음처럼 보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나는 오늘 아침 뭉툭한 까치수영을 만나고, 또 11시간 후에 비바람에 꽃을 다 떨어뜨린 꽃을 바라보며 우리 형님의 꽃양말을 겹쳐 그려보는 마음이었다. 이 모두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순간을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뭉툭한 까치수영의 모습과 형님의 꽃양말은 우리 인간의 순수함의 본질을 대변하는 것이라 믿었다.
고전이라 부르는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나 까뮈의 이방인의 주인공들은 자연 그대로의 심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온 현재를 사랑하며 순수하게 살아가는 사람, 이는 우리 인류 모두가 추구하는 삶의 형태다. 하지만 언제나 동떨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만나는 책속의 주인공들은 우리를 제 자리에 돌려주곤 한다. 이에 좋은 책들을 고전이라 칭하며 거듭 읽히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자연 역시 인류 최고의 고전서가 됨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취할 수 없음을 자연에서 책에서 얻고, 배우고, 또 그것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나 역시 살아오면서 간혹 순간순간 내 마음이 닿는 곳에 최선으로 임했는지를 뒤돌아본다. 또 지나온 내 시간들에 어떤 아쉬움이나 후회를 해 본 적은 없었을까. 오늘 만난 여타한 모습들에 나를 비추어 보며 결국은 나의 순수함의 여부를 챙기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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