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옛것을 좋아한다. 좋아한다함은 그 옛것에 대한 욕심은 아닌 것 같다. 옛것이 지금까지 남아있기 까지 지나는 세월동안 간직하고 있는,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 어느 안도감과, 뿌듯함, 그 달콤함… 그런 느낌들의 정서적인 면에서의 추억이지 결코 물건에 대한 애착은 아니다. 내 마음 속에는 그 옛날의 정서를 느껴 보고자 하는 그리움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꽃 수놓은 예쁜 옛 돌담길을 만나러 가는 날은 한여름의 더위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한여름 낮의 더위 속 정적감은 옛 돌담길을 만나는 정취를 자아내기 충분하기에 내심 차분한 마음으로 40여분을 달려갔다. 눈에 들어오는 한옥과 그 주변의 돌담길에는 고요함이 가득했다. 햇살에 익은 초목들은 힘을 잃은 듯싶었지만 저녁나절의 아이들의 함성이 들리면 금방 생기를 찾으려고 쉬는 참일 것이다.
내가 찾아왔던 목표물을 아끼는 심산으로 우선 돌담 골목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3부잣집이라 한 만큼 세 곳의 가옥을 모두 둘러보고 싶었는데, 두 곳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다행히 내가 꼭 찾아보고픈 가옥만큼은 개방되어 있어 적이 안도 하는 마음으로 골목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고요함으로 빚어진 길은 참으로 정갈하다.
담을 이룬 돌들은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었다. 돌들은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 흙과 잘 어울리고 있다. 서로 어울린다함은 자신을 지키면서 남에게도 맞춰줌으로 이뤄낼 수 있음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 어울림 속에는 나로서는 알지 못 할, 기억하지 못할 그 시대의 삶과 이야기들도 섞여 있을 것이니 문득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나 역시도 한없이 정숙한 마음이 되고 만다.
저쯤 어디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담 넘어 들려올 듯싶다. 알맞게 나무그늘이 내려진 곳에는 멍석을 깔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우리 할머니들의 모습이 보인다. 담장위의 담쟁이덩굴은 담 안의 정경을 훔쳐보듯 담벼락에 붙어있는 다른 줄기를 받침으로 쑥 올라서서 안을 기웃거린다. 무엇을 보았을까.
담벼락 밑에 오밀조밀 피어있는 약모밀을 만났다. 모습부터 크기까지 어찌나 귀여운지… 담벼락 및 양지쪽에서 소꿉놀이를 하던 내 모습인 듯 반갑다. 그 옆의 멋없이 키만 키운 개망초가 자기도 보아 달란 듯 바람에 휘청거리니 이 여름 낮의 정적은 그들의 도란거림으로 가득하여 더욱 고요하다.
아직은 도심에 물들지 않은 길, 어느 집 담장일까 안에서 자란 뽕나무의 오디가 제법 탐스럽다. 담장안의 가지에는 오디가 주렁주렁 달렸는데 담장 밖의 가지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가는 길손들의 손을 탔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탓하지 않았던 듯싶으니 담을 통한 인심 나눔의 넉넉함을 보았다.
담은 이렇듯 공간과 공간을 가르기 위함이겠지만 나무 하나를 끌어들여 서로 정으로 소통하고 있는 존재다. 돌담길을 세 바퀴를 돌아 낯을 익힌 후, 내가 방문코자 하는 가옥의 기세당당한 대문 앞에 이르니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대문 옆 담장 안의 탱자나무는 빼꼼히 고개 내밀며 돌아오라 일러주니 참으로 정겹다. 담장은 탱자나무로 밖의 사람과 소통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가옥으로 통하는 아담한 길을 따라 드니 정원의 유실수들이 한 눈 가득 들어온다. 살구나무, 감나무, 추자나무, 앵두나무들이 무성한 잎 사이로 열매를 키우며 자라고 있었다. 사람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된 듯, 저들만의 수런거림이 초록물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유실수들을 바라보며 내 추억을 꺼내 본다.
가옥은 100년의 시간이란 세월을 껴안고 있는 듯, 많이 낡아 있었고 장독대며 뜰 곳곳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작은 규모의 연못에는 커다란 연잎이 세월을 비켜간 모습으로 지금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상스레 밀려드는 안온함으로 조심스레 별채를 돌아서니 아. 그곳에 있었다. 십장생 문양의 꽃담이 있었다. 화려했다.
유난히 높은 담과 대문 앞에서 선뜻 들어오기 망설였던 마음들을 녹여주는 꽃 마음이었다. 아녀자들이 기거하는 안채를 가려주는 배려의 마음을 표현한 담이다. 이 꽃담은 부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닌 모두를 위한 담이었다. 또한 집 안에 자리한 이 꽃담은 장독대와 텃밭 등 생활공간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담이었을 것이다. 남을 배려하며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한 공간이다. 꽃담은 막힘이 아닌, 보이지 않는 소통의 벽이었다.
가옥 주인이 집을 지으면서 경복궁 자경전의 꽃담을 모방하여 세웠다고 전해진다. 좋음을 좋음으로 여기며 내가 거느리는 식구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부자라서가 아닌 서로를 위한 배려의 마음에서 비롯되었기에 그 흔적을 찾아오는 후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음일 것이다.
모든 사물은 과거를 지닌 채 오늘을 살아간다. 그 사이에 끼어든 시간에 치유되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옛 꽃담을 만나고 옛 돌담을 거닐며 내 안에 자리한 정서들을 꺼내보면서 동안 알게 모르게 거쳐 왔던 마음의 상처들이 치유되고, 또 될 것이란 편안함을 느꼈다. 계절이 바뀔 때 만나는 눈부신 아름다움을 마음껏 선사 받았으니, 보답으로 내 마음의 꽃담에 햇살을 불러 꽃을 피워 꽃향기를 선사할 수 있는 소통의 꽃담을 지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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