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날의 산책은 까닭 없이 좋은 기분으로 가득해진다. 비 맞은 초목들의 함초롬한 모습들이 빚어내는 차분함에 덩달아 내 마음까지도 젖어드는 까닭이다. 큰 비 내리는 아침 발맘발맘 뒷산 오솔길을 걷다 도토리나무 아래에서 비를 비켜 본다. 무성한 나뭇가지들을 우산보다도 훨씬 넓게 펼치며 안온함으로 비를 가려주는 마음 좋은 도토리나무다.
그 도토리나무가 요즈음 무수한 가지를 꺾이는 수난을 겪고 있다.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도토리를 취하려고 그렇게 나뭇가지를 꺾어 놓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소행의 주인공이 도토리거위벌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불이 확 당기듯 마음이 쏠리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뭇가지들의 널브러짐은 한 작은 미물이 지닌 모성애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거위벌레는 막 영글어 가는 도토리에 알을 낳고,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도토리의 영양분을 먹고 자란다. 그 도토리가 익어 딱딱해지면 애벌레는 더 이상 도토리로부터 먹이를 취 할 수 없다. 하여 어미인 거위벌레는 도토리 영양으로 비대해진 애벌레를 땅으로 내려 보내기 위해 가지를 통째로 잘라 떨어트릴 뿐 아니라, 떨어질 때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잎을 달린 채 꺾어, 나뭇잎 비행기를 만들어 떨어트린다 한다. 작은 거위벌레의 영민한 모성애는 덩치 큰 내가 감히 따를 수 없는 위대함이었다.
도토리나무 역시 제 열매 일부를 거위벌레의 모성애에 희생하고, 자신 또한 모성으로 도토리를 둥글게 키워간다. 도토리 열매가 둥근 까닭은 익은 도토리가 떨어지면서 멀리멀리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란다. 자식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일찍부터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 속 생물들은 이처럼 자식들을 정성을 다해 키우기도 하고, 다 자란 자식을 스스로 멀리 보내며 살아간다. 기특함에 고개를 젖혀 도토리나무를 새삼 바라보노라니 나무는 내 얼굴에 빗방울을 톡 떨어뜨리며 계면쩍어 한다.
움직일 수 없어 오직 한 자리에 서서 자라는 나무는 그런 지혜를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거위벌레는 애벌레를 나뭇잎에 태워 내려 보내는 법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을까.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사람인 나는 대책 없이 자식들을 품안에 가둬 키우며 삶을 간섭하고 있으니 미물 앞에서 내 마음을 감추고 싶다.
둘째 아이의 일이 스쳐 지나간다. 지난 주말을 틈타 친정어머님의 생신을 앞당겨 기념하였다. 일 년에 한 번, 온 친정식구가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기도 하다. 식구들의 휴가를 겸할 겸, 멀찍이 부산에서 모인 후 거제도, 통영, 고성 상족암을 경유하는 계획이었다. 나는 일 때문에 부득불 하루 늦게 출발하여 통영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우리 둘째아이가 꼭 참석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취직 후, 외할머니를 한 번도 뵙지 못했기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다고 한다. 생각이 기특하여 그러라하고 서로 간에 만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소식에 반겨하던 마음이 한순간, 갑자기 빨간불이 켜진다. 하필이면 그 날 부산에 많은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그만 마음이 좌불안석이 되고 말았다. 나야 통영으로 가니 괜찮지만 부산까지 가야하는 운전 초행길의 아이가 여간 염려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식구들과 통화하고, 아이와 밤늦게까지 문자를 주고받으며 결국 아이의 행보를 묶어 놓았다. 다음 기회에 할머니를 찾아뵙기로 하자 했더니 아이는 여간 서운해 하지 않는다. 그냥 부산으로 가라 해도 되겠지만 앞지르는 내 걱정이 아이를 서운케 했다.
엄마의 자잘한 근심걱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여태껏 잘 해온 아이다. 그런데도 나는 늘 아이의 일상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걱정하기 일쑤다. 잘 지낼까? 하는 궁금함을 참다 참다 전화라도 하면 잘 받지도 않는다. 내 마음은 금방 무슨 일이지?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아닐까? 하며 건방진 마음을 갖기 일쑤다. 부재 중 전화 표시를 보고 걸려온 아이의 목소리는 언제나 쾌활하다. 장난스럽게“ 어무니, 전화하셨어요?”하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아이는 나보다 훨씬 쿨 하게 엄마의 정을 받아들이고 있다.
아이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다는 내 안의 감정에 휩싸여 더욱 아이를 간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며 생각의 반전을 기해보지만, 내 성격은 쿨 하지 못하고 늘 미지근하다. 자식에 대한 옳고 그른 모성애의 한계는 무엇인가. 내 걱정만을 앞세워 아이의 하고 싶은 마음을 꺾어 놓았으니 참으로 허탈한 마음이 가득하다.
아무리 빗길이 위험해도 오라 가라 간섭하지 않았으면 아이는 스스로 빗길의 위험을 경험하며 새로운 안전 법을 체득하였을 것이다. 부모가 나서서 위험을 막아주고 감싸주기 전, 아이가 위험을 스스로 체득할 수 있도록 거위벌레처럼 떨어질 때의 완충제 역할만을 하고, 도토리나무처럼 자식들이 어느 곳이든 안전하게 굴러가도록 둥글게 빚어내는 그런 깊은 모성으로만 아이들을 대했어야 했거늘…
나름 욕심을 비워 가볍게 살아온 세월이라 자부하건만 알게 모르게 자잘한 욕심으로 마음의 군살을 찌운 세월인 듯싶다. 무거운 군살에 끌려가느라 삶의 고삐를 놓치고 생각의 방향마저 잃어버린 것만 같으니 묵묵히 슬기롭게 살아가는 저들의 삶의 지혜를 배워 내 의식을 새롭게 조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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