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화암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순전히
안도현 시인의 ‘花巖寺, 내 사랑’이라는 詩를 접하고부터이다.
처음에는 구례 화엄사를 말함인가? 할 정도로 화암사라는 절의 존재 가치를 몰랐다.
그 시 덕분인지 하나둘 화암사에 대한 글을 만나기 시작했고
사찰 주변에는 이른 봄에 만나는 복수초, 얼레지 등 각종 야생화 군락지가 있다는 말에
나는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곳 역시 마음뿐이었다.
신광사를 뒤로 하고 찾아 나선 길, 내비 따라가는 길은 생전 처음 가 보는 길이었다.
완주군에 속하지만, 대둔산에 더욱 가까우니 충남에서 더 가까운 사찰이었다.
요즈음 사찰 대부분은 관람객과 자동차들로 인하여
고즈넉하고 빛바랜 절집이 안겨주는 평온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 찾아가는 불명산 자락에 푹 안긴 화암사는 주차장에 다다를 때까지
제대로 찾아왔을까? 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낯선 길이었다
싱그랭이 마을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아, 가까이 왔구나 느꼈을 정도!!.
주차장은 소박했지만 정갈했다. 차에서 내려 곧바로 숲 오솔길로 들어섰다.
딱히 화암사라는 안내표시는 없이 화암사 안내문만 서 있었다.
길이 나 있는 곳으로 따라 들어서니 한두 명이 내려오고 있다.
그나마 오늘이 초파일이어서 간간이 사람들을 만나는듯싶었다.
길가의 식물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걸었다.
이른 봄꽃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작은 폭포가 연이어 나타나며 나를 즐겁게 해 준다.
바위에 매달리다시피 피어있는 말발도리꽃이 반가웠다.
작은 물줄기는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리는데 물소리가 참으로 깨끗하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간간이 만나는 야생화들의 자태가 반가웠다.
어디쯤부터인가 계단이 나오기 시작한다. 계단 난간에 안도현 시인의 시가 걸려 있다.
연이은 계단에 남편은 힘이 드는지 폭포 앞 바위에 걸터앉더니 나만 다녀오라 한다.
그래요. 계곡물과 폭포를 바라보며 수행하시오~ 하고서 혼자 걸음을 재촉했다.
계곡 사이에 놓인 철재 계단이 계단 아래를 흐르는 맑은 물을 밟지 말라는 듯
오른쪽 왼쪽으로 번갈아 놓여 있는 길을 다시 힘겹게 15분쯤 걸었을까.
가파른 낭떠러지에 작지만 이곳에서 가장 우렁찬 폭포가 있고
그 내를 건너는 다리 하나가 있다.
눈을 들고 바라보니 절집 지붕이 보인다.
아, 이곳에서 마음을 씻고 올라오라는 뜻인가 보구나~
이 작은 공간에 절집이라니!!! 오지의 산골짜기에 하늘과 땅이 감추어 둔 화암사였다.
바위 절벽 위에 앉은 화암사는 진정 꽃이었다. 안도현 시인의 시가 정말 절묘했다.
먼저 화암사의 정문 격인 우화루를 만났다.
어느 사찰이든 누마루를 지나 대웅전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마루 밑을 지나며 자신을 먼저 낮추는 경지라 했다.
한데 이곳 화암사는 우화루 왼쪽으로 어느 가정집의 대문 같은 소박한 문이 있었다.
이는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누마루 밑은 열어 놓지 않고
공부하는 사람만 작은 문으로 들어오라는 의미라 하였다.
이 깊은 산중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걸러본다는 표현이 맞을까.
높이 모란 닮은 연등 하나가 걸려 있다. 참 곱다.
이 건물은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세워진 것으로
그 후에 여러 차례 수리되었으나 크게 변형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정면 지층의 기둥은 4칸이나 2층에서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극락전은 고려 충렬왕 23년 1297에서 충렬왕 복위 9년 1307 사이에 새롭게 지어졌다.
그 후 세종 7년 1425에서 세종 22년 1440 사이에 고쳐 짓고,
선조 30년 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선조 38년 1605에 다시 지었다.
대문 격인 문으로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니 아! 극락전이 보인다.
조그마한 마당?을 중심으로
극락전과 적묵당 불명당, 우화루 딱 4채 건물이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참으로 알찬 작은 사찰이 아닌지…
초파일 연등도 ㅁ자형 공간에 손으로 헤아릴 만큼만 걸려 있었다.
이 사찰의 하나 하나가 국보에서부터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니
무엇 하나에도 깊은 관심이 배가 된다.
극락전에서 부처님께 예를 갖추고 내부를 둘러보니
흔하지 않은 닫집도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있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동종도 극락전 안에 있었으나
극락전이 국보인 만큼 이 모두 사진 촬영을 금한다는 안내에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극락전 현판도 한자씩 따로 걸려 있음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 극락전은 특히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하앙식(下昻式) 건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연유로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하앙 식은 건물 바깥쪽에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
지렛대 원리를 통해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라고 한다.
기둥과 지붕 사이에 끼운 긴 목재인 하앙은 처마와 나란히 경사지게 놓아
처마와 지붕의 무게를 균등하게 받쳐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극락전 건물이 하앙식 구조인 점이
편액을 한 글자씩 따로 만든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저절로 울린다는 설을 지닌 동종은 극락전 안에 있으며
전체 높이 140cm, 몸체 높이 85cm, 입 지름 70cm이다.
종의 맨 윗부분에는 꽃을 세워 도드라지게 장식한 문양이 있다.
어깨에는 간략화된 꽃무늬 띠를 둘렀다.
어깨 아래로는 4개의 유곽이 있고, 그 사이에 보살상을 새겼다.
유곽은 길이 25cm, 폭 25cm이며,
덩굴무늬로 장식된 곽 안에는 9개의 유두가 있다.(위키백과 인용)
화암사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기록이 뚜렷한 곳으로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로 이용해 조화를 이루도록 한 건축양식에서
선인들의 슬기를 새삼 느끼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공양간 옆 벽에 걸린 안도현 님의 시를 다시 읽어보고 있는데
여자 두 분이 공양간에서 도시락?을 받아 간다. 무어지? 하며 살짝 기웃거리는데
한 보살님이 ‘도시락 드릴까요?’ 한다
머뭇거리며 네~ 하니 '하나만 드리면 되나요?' 묻는데
밑에서 기다리는 남편 생각에 하나 더 주세요 하며 받아 들고 나니
아이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화암사를 둘러보며 절로 지닌 경건한 마음이 부끄럽다.
젯밥에 더 욕심을 내고 있지 않은가~~
도시락을 행여 떨어뜨릴까 꼭 안고 내려오니 남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주차장까지 들고 내려와서 차 안에서 맛있게 먹었다.
사실 화암사 가는 길 그 어디에도 흔한 음식점 하나 없었던 것이다.
'마음따라 발길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봉화산 철쭉 (25.05. 08) (0) | 2025.05.19 |
---|---|
부처님 오신 날, 산사를 찾아서(신광사) (0) | 2025.05.05 |
그 길에 하마 갈대 꽃 피었을까 (0) | 2024.11.17 |
왕들이 찾아 왔던 복천암 (0) | 2024.11.15 |
가을, 허허로운 길을 달렸다 (29) | 2024.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