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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맘의 글방

내가 수(繡)놓은 병풍

물소리~~^ 2019. 2. 13. 11:05

 

 

 



   막 초여름이 시작되는 늦은 봄날, 유리창에 얼추 한 번 걸러져 들어온 햇살의 부드러움이 마냥 좋아 햇살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 한 택배직원은 나에게 아주 커다란 물품 하나를 배달해 주었다. 부산 고모님이 보내주신 병풍이었다. 이렇게 나에게 돌아오다니뭉클 솟아나는 옛 추억에 조심스런 손길로 포장을 벗겼다. 그 옛날 그대로, 내 손으로 수놓았던 꽃들이 마치 몇 백 년 동안 묻혀있던 왕릉안의 유품들이 햇살을 받고 반짝이는 것처럼 고풍스런 빛으로 곤댓짓을 하며 나를 바라본다.


그 시절, 무던히도 입시공부에 매달려야 했던 고등학교생활은 우리뿐 아니라 선생님들에게도 크나큰 부담이 되셨음은 물론이다. 특히 학과 공부가 아닌 실습을 주로 해야 했던 가정시간은 괜한 시간을 허비한다는 의식으로 은연 중 기피하고 싶은 시간임을 선생님도 파악 하신 듯싶다.


2학년 초 어느 날, 가정선생님은 가정시간에 실시해야 할 각종 실습시간(요리, 바느질, 수예 등)을 없애는 대신 선생님께서 제시하시는 과제를 1학기 내에 제출하면 2학년 전체동안의 실기 점수로 인정해 주시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입시공부를 위한 시간에 쫓기던 우리들은 언제든지 자유로운 시간에 완성을 하여 제출하면 된다는 조건에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시간과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동양자수로 완성해야 할 6폭짜리 병풍이었다


큰 작품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쌀 한가마보다도 비싼 비용은 넉넉지 않은 우리 사정에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어머니께 상의를 하자 처음에는 난감해 하시더니 고모한테 부탁 한 번 해보자 하신다. 당시 어머니는 혼기가 꽉 찬 우리 고모를 생각하시면서 늘 좋은 것, 신기한 것이 있으면 온통 고모 혼수품으로 챙겨 놓으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 밖에 없는 시누이 결혼에 대처해야 할 큰며느리의 몫에 많은 부담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까닭으로 어머니 생각은 병풍 재료값을 고모한테 부담해 달라고 하고 수는 내가 놓는 것으로 하자는 조건이었는데 나는 점수 생각에 얼른 대답을 했다. 그 당시 고모는 간호사로 근무하시면서 호주까지 다녀오시기도 했으니 우리의 로망이셨다. 고모는 아마도 혼수보다도 조카인 나를 위한 마음으로 승낙을 하시고 그 비용을 주셨을 거란 확신에 조금도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진한 청색 공단 바탕에 매화, 국화, 대나무, 동백, 장미와 목련으로 이루어진 6폭에 수를 놓는 작업은 정말 끈질긴 인내를 요구했다. 두툼한 막대기로 직사각형 틀을 만든 후, 그 곳에 바탕천을 맞춘 다음 압핀으로 빙 둘러 고정을 하여 팽팽해지면 바늘에 고운 실을 꿰어 앞뒤로 바늘을 꿰었다 빼었다 하며 수를 놓아갔다. 공부에 싫증이 느껴질 때,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와야 하는 날의 여유로운 시간 등 틈틈이 수를 놓아가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수놓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댓 잎 하나를 수놓기 위해 바늘 두 개로 진초록과 연초록의 실을 적당히 배치 해 놓으면 꼭 살아있는 대나무 잎처럼 고운 빛이 감돌며 두툼한 입체감이 느껴질 때의 마음은 마냥 뿌듯하기만 했다. 목련꽃의 생동감을 살리기 위해 약간의 솜을 붙인 다음, 그걸 감싸면서 아이보리 색실로 꽃 하나하나를 완성해 갈 때의 마음은 무언가가 내 힘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충만함과 함께 목련화 노래를 흥얼거리게 하였다. 중간에 포기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나는 병풍을 완성했고 선생님의 평가방식에 따른 최고의 실기 점수를 받았다.


점수를 받기위한 목표달성을 위해 나의 인내심을 담금질하며 병풍을 완성 한 후, 꼬리뼈의 아픔으로 한동안 고생을 했지만 잔잔한 정이 들대로 들어버린 나의 병풍을 고모께 건네드렸다. 결혼 후 고모는 직장 생활을 계속하셨기에 근무지 부산으로 이사를 가셨고, 우리는 집안 행사가 있는 날에 한 번씩 만나는 일 말고는 거의 왕래가 없이 지나는 생활이었다. 고모님은 나와 고종사촌이 되는 아들, 딸 두 자녀를 두셨고 자녀들의 백일, 생일 등의 기념일에는 항상 사진을 찍어 우리 집에 보내 주시곤 했는데 그 사진의 배경에는 언제나 내가 수놓은 병풍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사진을 대할 때면 사진 속의 인물들보다도 병풍의 꽃들을 바라보며 내가 수놓은 병풍이라고 자랑하며 즐거워하곤 했다.


세월이 흘러 고종사촌들이 결혼을 하여 고모님이 며느리, 사위를 맞이하신 후, 어느 날 집안 행사로 만난 고모에게 난 조심스럽게 말씀을 여쭈었다. '혹 며느리가 혼수품으로 병풍을 해 오지 않았느냐' 고. 그랬더니 '아니 그런 것 없었다.’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난 그만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행여 새로운 병풍이 생겼다면 내가 수놓은 병풍을 돌려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운한 마음을 감추고 우리 어머니께 지나는 말처럼 그 병풍을 이제 내가 가졌으면 좋겠다.’ 고 말씀 드렸더니 어느 틈에 고모님께 말씀을 전해 주셨던 것이다. 그 동안 애지중지 간수해 주신 고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작정 돌려받고 싶은 내 마음만을 전했으니 고모님께서는 도리어 서운 하셨을 것인데도 그냥 그렇게 보내주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수놓은 6폭 병풍은 내 품으로 돌아왔으니 2, 17살에 수놓았던 병풍과40여년 만의 해후였다. 고모님 덕택에 넉넉하게 받은 점수가 있었지만 난 대학 입시에 실패했으니 무엇 하나 보답을 해 드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음식을 잘 한다든지 하는 특별한 솜씨를 키우지 못하고 살아온 터라 후에 며느리 들이면 무엇으로 위엄을 세울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자랑거리가 하나 생겼으니 든든하기 짝이 없다. 그 때쯤 표구를 말끔히 새로 해 놓고서 내 이 수를 놓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이 병풍을 손에 넣기까지의 사연을 들려주어야겠다.


그 시절 어머니가 고모를 챙겨주시던 마음, 조카인 내가 고모를 우러르며 좋아했던 마음, 또 조카인 나의 마음을 몰라라 하지 않고 편의를 베풀어준 고모의 마음 모두를 이 병풍에 한 폭을 더해 마음의 수를 놓아 꾸며 놓고 싶다. 하여 7폭이 된 병풍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추억을 공유하자 생각하니 자꾸만 미소가 번진다.





▼ 고등학교 1학년 때 호주에서 고모가 보내주신 엽서

학창시절 앨범에 끼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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