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부터 목이 불편하다. 이물감이 느껴지고 따끔거리기도 하더니 급기야 잠자는 동안 불편한 목 넘김으로 두어 차례 물을 마시게 했다. 이제는 어딘가가 조금만 아파도 겁부터 나는 것이다. 주말이어서 급한 대로 약국에서 약을 사서 먹어보았지만 별 효험이 없는 것 같았다.
월요일 아침 일찍 이비인후과를 찾아 갔다. 림프종 치료 후로 이번처럼 목이나 코에 이상이 느껴질 때면 진찰을 받은 병원이다. 하니 의사는 내 병력을 알고 있는 터, 늘 세심히 진찰을 해 주신다. 먼저 체온을 재보았지만 열은 없단다. 목을 찬찬히 살펴보시더니 편도선이 많이 부었고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며 내시경으로 사진을 찍어 나에게 보여 주신다.
화면의 확대사진으로, 내가 보기에는 강낭콩만한 크기의 노란 주머니가 보였다. 의사는 염증주머니 같아 보이니 일단 약을 2일 먹어보고 차도가 없으면 큰 병원으로 가야된다고 하니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큰 병원이라는 말은 나로서는 공포다.
애써 태연한 척 누구에게도 의사의 말은 전하지 않고 그냥 이비인후과에 다녀왔다고 말은 했지만 머리에는 종일 의사의 말이 맴을 돌고 있다. 월초라 일이 한창 바쁜 시기이니 일에 파묻히면서 그냥 염증일 뿐 일거야 하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이틀을 참고 기다려야하는 시간이 형벌처럼 다가온다.
저녁식사 후 늘 하던 대로 산책에 나섰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문득 한 생각이 스쳐 지난다. 나에게 좋은 시간을 만들기 위해 늘 규칙적인 생활을 해 왔는데도 좋지 않은 결과라면 어쩌지? 하면서 갑자기 산책길이 아닌 어디론가 일탈을 하고 싶은 것이다.
어쩔까 궁리하노라니 마침 폰 커버에 만원 지폐 하나와 카드가 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택시를 타고 서점으로 갔다. 며칠 전 신문에서 휴가철에 읽을 만한 책을 선정한 기사를 봤기에 그 책 들 중 하나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서점에 들어서니 정렬된 많은 책들에 그냥 마음이 푸근해진다. 서점 한 코너 공간에서는 초청된 어느 문학인이 시민들을 모아 놓고 문학 강연을 하고 있었다. 한 번 들어볼까 기웃거려보니 모두 젊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누구나, 아무나 청취할 수 있는 자리라 했지만 괜히 주눅이 들었다. 살짝 빠져 나와 그냥 서가 사이를 거닐다.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라는 독일 작가의 소설이다. 이 작가는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
책의 제목인 ‘올가’는 소설속 여 주인공 이름이다.
올가는 판단이 밝은 당찬 여인이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가 북극 탐험을 떠난 후 생사여부가 불확실하지만, 끝내는 죽음으로 체념하면서도 끝까지 그를 놓지 못하고 희망을 넣어주는 마음에 이끌려 저절로 책장이 넘겨지곤 했다. 주인공 올가의 이야기는 19세기 후반의 독일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이 역사 속으로 들어가며 비스마르크의 과거부터 나치의 흔적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 까지 근 100여 년에 걸친 기록들이 펼쳐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몰랐던 독일의 역사를 조금은 더 알게 되었다.
독일이 지배했던 서아프리카지역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나 역시 처음 접하는 기록이기에 갑자기 관심이 폭발하면서 읽기에 집중하였다. 책을 읽다가 헤레로족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검색을 해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나치 독일의 독재만 알고 있었는데 아프리카 원주민까지라니~~ 이런 역사적 시대의 편견에 휩쓸린 남자와 달리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사랑을 지켜가는 강인한 여자의 이야기였다. 올가는 평범한 여인이었지만 이성적인 판단의 안목으로 삶을 관찰한 여인이었다.
책을 읽으며 기다리기 지루한 2일을 보내고 이비인후과 병원을 다시 갔다. 차도가 없단다. 나쁜 결과라는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낭종의 자리가 하필이면 림프절에 있으니 일단 검사를 해 보라고 소견서를 써 주었다. 의사의 소견서에는 병명이 "편도선 림프절 상피낭종" 이라고 쓰여 있다. 불안함이 하늘을 치솟는다.
갑자기 큰 병원 예약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내가 다니던 대학병원에 전화를 하여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아직도 관찰치료중인 내 이력을 확인하고 서둘러 예약 일을 잡아서 알려 주겠다고 하여 일단 전화를 끊었다.
일부러 태연한 척 했지만 내 마음은 좌불안석 이다. 두 시간 후에 전화가 왔다. 다음날인 목요일 오후 3시 45분의 이비인후과 진료로 예약되었으니 차질 없이 내원하라는 안내에,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 순간부터 나는 그 무엇도 생각이 나지 않으면서 오만 생각이 다 드는 것이다. 예약 일을 받아들고 너무 예민해진 탓인지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거린다. 배가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다.
병원에 도착, 차례를 기다렸다. 대기석에 앉아있는 많은 사람들을 둘러보니 왜 이렇게 몸이 힘든 사람들이 많은지…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고 의사 앞에 앉아 일차병원 소견서와 내시경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의사는 내 증상을 찬찬히 들어보고, 살펴보고, 코를 통해 들어오는 내시경으로 두 번이나 검사하고 하더니
“별거 아니 예요”
목도 정상이고 편도선이 많이 붓긴 했지만 심각한 것은 아니란다. 낭종은 일종의 물혹 비슷한 성질의 것이라고 제거해도 되고 그냥 지내도 되는데 이물감 등의 불편이 지속되면 그때 제거해도 된다고 하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눈물이 쏙 나온다. 긴장이 풀렸을까? 병원에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세수도 못하고 그냥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며칠 전에는 어지럼증과 메슥거림으로 내과 병원에 가니 탈수현상이 있다며 무리하지 말라 했거늘,올 여름이 나에게는 조금 버거운 여름인가 보다.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자는 나의 다짐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새겨 놓았다. 내게 주어진 것들을 거부한다면 내 인생을 최고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니… 아픔과 내 인생을 엮어 올가처럼 이성적으로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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