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 대신 가지를 피워내는 느티나무
요즈음 천지가 꽃으로 가득하니 내 눈이 호사한다. 앞 베란다에 나서서 호숫가에 구름처럼 뭉실뭉실 피어난 벚꽃구름을 바라보고, 얼른 뒤 베란다에 종종걸음으로 가서 우리 아파트와 인접한 산등성의 개나리와 벚꽃을 또 바라보고, 관리사무소 지붕을 하얗게 수놓은 도톰한 목련꽃을 바라보노라면 아침 집안에서의 나의 동선이 꽤나 부산한 것이다.
오늘 비 내리는 날의 노란 개나리는 더욱 진한 빛으로 자신을 돋보이고, 꽃분홍진달래는 얇은 잎을 함초롬히 적시며 추워하고 있다. 귀여운 아기 주먹손 같은 목련의 질감은 그 옛날 내가 수놓았던 병풍 속 목련을 연상케 한다. 모두들 제각각의 빛으로, 모습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있다.
이런 화사한 풍경 속에서 유독 내 눈길을 끌어가는 또 하나의 풍경이 있으니 느티나무이다. 우리 아파트는 원래부터 산등성을 깎아 조성한 곳이어서 아파트 공간 곳곳에 큰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하지만 갈수록 주차난에 직면하면서부터 공터의 나무들을 베어내고 주차장으로 만들곤 했는데, 건물 가까이 자라는 느티나무들은 그나마 잘 관리하고 있으니 풍경 좋고 공기도 꽤나 괜찮은 아파트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일지라도 익숙해지면 일상이 되고 심드렁해지는가보다.
재작년 가을이 끝날 무렵 무성한 느티나무의 가지치기를 했다. 아파트 창을 가릴 정도로 무성한 나무의 굵직한 줄기를 뭉텅뭉텅 잘라내었다. 가지 친 나무는 볼썽사나웠지만 건물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라고 주민들을 이해시킨 결과였다. 늘 만나는 익숙한 일상으로 변한 풍경은 편리함에 양보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튼실한 가지를 잃어버린 느티나무는 가지를 지키기 위해 제 안에서 뿜어 나오는 그 열정을 다스리기 어려웠을까. 주체할 수 없는 끼를 마구 품어내는 듯 가늣한 가지를 넘실넘실 피워내고 있었다. 균형을 잃은 나무는 참 앙상하고 처연할 뿐 아니라 공상 만화에 나오는 괴기스런 식물처럼 보이니 몸이 오싹하기도 하다.
사방의 나무들이 너도나도 꽃피는 시절에 느티나무는 어쩌자고 가늣한 줄기를 마구 피우고 있을까. 꽃 대신? 그렇다면 꽃 없는 꽃가지일까? 아! 그렇구나, 어쩌면 울분으로 피워낸 꽃가지였구나! 문득 스치는 생각 하나에 마음이 모아진다.
우리 조상님들은 고추장이나 된장이 발효되는 과정에 표면에 하얗게 피는 곰팡이를 ‘꽃가지’라고 하였다.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 나는 의아했다. 보기에 혐오스러워 걷어 내고 마는 곰팡이에게 꽃가지라는 예쁜 이름이 가당키나 할까? 하여 그 이름의 연유를 알고 싶었지만 내 궁금증을 풀어주는 그 어떤 풀이를 나는 만나지 못했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고추장과 된장이 좋은 빛깔과 좋은 맛으로 거듭나기 위한 숙성의 과정에서 뱉어 내는,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나쁨이라고 생각했다.
무릇 나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얼굴표정에 다 나타나듯, 좋은 맛과 빛으로 남기 위해 오랜 시간 참고 견뎌내야 했던 고통의 나쁨을 뱉어 내야 했을 것이다. 우리가 먹어야하는 신성한 먹을거리에 나쁨을 나쁨이라 말하지 않고 역설적으로 곱게 표현했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서 나온 이름 꽃가지는, 곧 우리들이 지닌 꽃가지 마음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생각지도 않은 일을 당하거나 억울함에 직면하면 머리가 하얗게 된다든지,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표현을 한다. 나는 그 순간에 우리의 마음꽃가지가 피어나는 현상이라고 빗대어 생각했었다. 나에게 닥친 어려움과 고통을 삭히고 삭혀 마음꽃가지로 피워내면 버릴 것은 버려지고 숙성된 진국의 마음만이 남을 것이지 않는가.
느티나무도 그렇게 듬직했던 본 가지를 잃은 아픈 마음을, 속상했던 마음을 지금 꽃가지로 피워내며 더욱 멋지고 든든한 나무로 거듭나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내 눈에 괴기스런 모습으로 보이는 나뭇가지들은, 스스로 마음 속 꽃을 피우기 위한 속풀이 꽃가지라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느티나무의 가늣한 가지들이 멋있게 보인다. 바야흐로 봄은 보는 계절이다.
'내맘의 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깜깜한 세상에서 환한 빛을 만나다 (0) | 2018.07.21 |
---|---|
신발 한짝으로 삶을 돌아보다. (0) | 2018.04.19 |
나만의 봄빛을 품은 봄동 (0) | 2018.02.13 |
도깨비에 홀린 아침 (0) | 2018.02.08 |
어느 겨울날 오후 (0) | 2018.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