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대를 기대하며 향적봉으로 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바위에 핀 얼음꽃
1시간 후 내려올 때의 바위 얼음꽃들은 사라졌다.▼
언제 찾아 와도 늘 그 자리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주는 산이 정말 좋다. 중봉을 오르는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주목나무를 헤아리는 습성으로 하나하나 눈 맞춤을 해 보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고할 뿐이니 더욱 멋지다. 언제 만나도 멋스런 그들은 늘 ‘나를 주목하라’고 주문하는 듯싶다.
참 상쾌하다. 중봉에 올라 덕유평전을 바라보노라니 아득한 저 길을 마냥 내닫고 싶어진다.
그 길에 지금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구름들만이 산을 휘저으며 그들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있었다.
산은 제 능선을 진한 붓으로 칠해놓고 여기까지 내 영역이라고 하늘에 고하는 듯싶으니 산의 골격이 참 멋지다. 이런 모습이 보고 싶어 달려온 것이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하찮은 나이지만 그래도 산을 보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아주고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 산이 정말 고마웠다. 현란하지 않은 색으로 안으로 스며들게 색칠한 산은 진정한 화가가 되어 나를 반겼다.
우리의 옛 그림에서 눈 풍경화의 눈은 흰색을 칠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변에 다른 색을 그 칠해 그 여백을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그렸다는데, 지금 저 산은 그렇게 나로 하여금 먼 높은 산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라며 능선을 짙게 칠해주고 있는 것이다.
색 없음으로 색 있음을 알려주는 은근한 마음 표현은 나를 한 없이 고요하고 침잠케 하는 최고의 화가인 것이다. 그 마음의 선물을 가득안고 이제 내려가야 한다. 그 사이 해가 반짝 났다. 상고대들도 주저하지 않고 제 몸을 녹여 내렸다. 가끔 그들이 녹아내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피치카토 음색 같았다. 텅 빈 겨울산은 그렇게 화가도 품고 음악가도 품고 있으니 어디 한 곳 빈틈없는 꽉 찬 그래서 더욱 든든한 산이다.
▲ 이제는 다시 돌아 가는 길,
향적봉 대피소에서 향적봉에 오르는 경사길의 미끄러움으로 사람들이 조심조심 걷고 있다.
3 시간여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충만함을 안고 내려왔다.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아니! 이럴 수가! 누군가가 내 차 운전석 쪽 후미를 강하게 치고 지났던 것이다. 깨진 잔해들은 그대로 주변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 현장은 산 위에서 즐거웠던 나의 마음을 싹 가져가며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주변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어 왔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살짝이 아닌 강한 부딪힘으로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전문 지식이 없는 내 육안으로도 수리를 하려면 크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후미 등은 물론 범퍼와 차체간의 간격이 벌어지면서 그 양 쪽 모두가 깨져 있었던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내 차에 블랙박스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냥 갔을 거라고 한다. 어찌 할 줄 모르다가 그냥 포기하는 마음으로 행여 도움이 될까싶어 바로 옆 차량의 번호를 메모해 두었다. 그 차량에는 블랙박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 안으로 들어와 운전석에 앉아 멍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와이퍼 밑에 종이가 끼어 있음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얼른 나가서 종이쪽지를 살펴보니 아! 사고 낸 사람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였다. 얼마나 감사한지!! 짧은 순간이지만 원망했던 내 마음이 부끄러웠다. 조심스럽게 전화를 하니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바로 알아차린다. 부산사시는 분이란다. 죄송하다면서 자기는 이미 사고처리로 접수해 놓았으니 월요일 아무 정비공장에 가서 수리를 받으라고 한다.
이제는 내가 미안했다. 아무리 보험처리를 한다 해도 견적이 많이 나오면 당사자의 보험료가 크게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내가 그곳에 주차하지 않았다면? 하는 마음도 드니 나도 모르게 메모 남겨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가 절로 나왔다.
산이 주었던 좋은 마음을 하마터면 잃을 뻔 했는데 그 작은 종이쪽지가 내 마음을 되살려 주었다. 참으로 감사했다.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망가진 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밀려드는 피곤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씻자마자 긴 잠 속으로 빠져든 토요일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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