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에 드러나는 건망증이 부끄러워 해를 가리다 ^^
일 년 동안 부어온 적금통장이 만기가 되었다는 연락을 은행으로부터 진즉 받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에서야 은행을 방문하였다.
만기 후 한 달여가 지나 있었다.
친절한 은행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창구 앞 의자에 앉아
천연덕스럽게 절차를 밟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앞에 놓여있는 단말기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음성이 흐른다.
비밀번호?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주로 많이 사용하는 다른 통장들의 비밀번호 서 너 개를 입력해 보았지만
모두 오류라는 메시지를 보내온다. 난감하였다.
어찌 길지도 않은 4자리 숫자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무슨 비밀을 만들려고 이렇게 비밀번호를 꼭꼭 숨겨두었단 말인가.
당황해하는 나를 바라보던 직원은
이미 신분 확인은 되었으니 비밀번호 변경절차를 밟고 진행하잔다.
승낙을 해 주니 직원은 1004라는 번호를 입력한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노라니 괜한 허무함이 물밀듯 밀려온다.
어째야쓰까~~ 벌써부터 이렇게 까마귀 고기를 먹고 있으니…
그러고 보니 이번만이 아니었다.
요즈음 들어 부쩍 무얼 생각하고 기억해 내는 일에 헤매고 있었다는 생각에 머문다.
단순히 나이 탓일까? 라기 보다는
행여 내가 몹쓸 병이라도 걸린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슬금 차오르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사람에게 있어 망각은 신이 내려준 최고의 선물이라 말하기도 한다.
근심 걱정 모든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기보다는 어느 땐 쉽게 잊고,
그 그늘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것들은 잊지 않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적금을 시작하고 일 년 동안은 일정금액을 넣기만 하느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4자리의 비밀번호는 잊어버릴 수도 있겠다.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메모를 해 두던지 해야 했는데,
나는 기억을 해 낼 것이라는 자만심에 빠져 지냈으니
아마도 그 비밀번호는 내 자만심에 녹아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요즈음처럼 모든 것들이 스스로 죽어가는 스산한 가을 정취가 있기에
내년 봄, 모든 생물들이 새로이 돋아나는 날들이 더욱 새롭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나도 무언가를 자꾸 잊어버린다고 안달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걸 잊고 멍청이가 되어 볼까.
멍청이가 아니라고 억지를 쓰며,
어정쩡한 건망증으로 더욱 근심만을 끌어안고 사느니
차라리 멍청이가 되어 늘 새로운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아가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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