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나와 6차선 큰 길을 건너노라면 고등학교가 있다.
학교 주변의 여유로운 땅은 알뜰한 사람들에 의해 텃밭으로 변해있다.
가끔 점심시간이면 한 바퀴 돌아보곤 하는데
고구마, 깨, 부추, 가지, 고추 등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괜히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오늘 문득 커다란 호박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세상에~~ 벌써 이렇게 익었구나!!
햇살을 받고 비를 머금고 바람에 제 몸을 이렇게 키우다니…
마치 엄마젖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아이처럼 탐스럽다
그렇게 싱싱하던 잎이 많이 시들고 추레해졌다.
가을 모습, 가을색이다.
가을색이 짙어간다 함은
가을을 나는 모든 것들의 차림새가 점점 초라해지는 일이다.
잎들이 수분을 잃어가며 메마르는 까닭은
자신들의 열매를 더욱 튼실하게 키우기 위해
모든 영양을 열매로 보내기 때문이란다.
숙살(肅殺)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이리저리 뻗어있는 호박덩굴의 메마른 줄기는
내 어머니 손등의 핏줄처럼 느껴지며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때가 되면 물러나는 것이 자연법칙이라지만
열매를 익히기 위해 메마름을 견뎌낼 수 있음은
지난여름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도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추억이 있어서일 것이다.
여린 새 잎은 쌈으로 내주고
풋풋한 호박은 전을 부치고, 새우젓과 함께 볶아지기도 한다.
이렇게 늙어서는 산후의 붓기를 빼는데 유용할뿐더러
겨울날의 진미 떡 사이에 끼어들어 긴긴 밤의 허기를 달래준다.
유아기부터 늘그막까지
무어 하나 버릴 수 없으니 얼마나 값진 인생살이인가.
호박꽃은
제 속에 들어온 벌에 꿀을 주면서 살그머니 꼭 붙잡아 버린다.
아이들은 살금살금 다가가 꽃을 오므려 얼른 꺾어 뱅뱅 돌리면
벌은 기절하여 제 침을 빼는 줄도 모르고 있지 않던가.
아이들의 시끌벅적 낭랑한 음성들도 어쩌면 저 튼실한 호박 속에 묻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못 생긴 꽃, 호박꽃?? 하지만
정작 호박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샛노란 별꽃을 피운다.
하고 싶은 말 꼭 묻어두고
아무렇게나 앉아있는 모습에서 후덕함이 물씬 느껴진다.
아마도 무지개 꿈을 꾸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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