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의 지팡이, 청려장
어머니는 절 마당의 잘 다듬어진 돌 위에 앉아 계셨다. 올해 89세를 맞이하신 울 어머니, 언니와 나란히 들어서는 우리를 보시고도 얼굴빛과 말씀만으로 반가움을 표하시며 선뜻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계셨다. 다리가 많이 불편하심을 알고 있기에 그러시려니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이 무겁다. 자식 된 도리로 무언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 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아직도 정정하신 성정으로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가시는 힘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옆에 비스듬히 놓인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일어나신다. 반지르르하게 잘 다듬어진 지팡이에 눈길이 간다. 청려장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청려장을 어머니가 들고 계셨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자그마한 절에 온 마음을 쏟으시며 소일하시는 어머니를 만류하지를 못했다. 이렇게나마 마음 두고 계시는 곳이기에 다소나마 안심을 했고, 당신 스스로도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시며 절에 다니시곤 하셨다. 그 절의 스님이 어머님께 만들어 주신 지팡이 청려장 이었던 것이다. 뿌리부분을 잘 손질 한 듯, 손잡이까지 있는, 칠까지 하여 윤이 나는 멋진 지팡이였다.
지팡이를 바라보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우선은 우리 자식들이 아닌, 스님이 만들어 주셨다는 것과, 이제 지팡이 없이 걷지 못하시는 어머님의 연로하심, 또 그 지팡이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내 눈길이 자꾸만 지팡이에 머문다. 기어이 세워놓고 사진을 찍는다.
청려장은 는장이 라고도하는 흔하디흔한 명아주라는 풀로 만든다. 명아주의 여린 잎은 나물로도 먹는 식물임에 그 여린 풀이 어떻게 지팡이가 될까. 이 풀은 한 해에 키가 1~2m 까지 자라는 특성으로, 가을에 뿌리까지 뽑아 그늘에 말려 다듬고 칠하는 많은 정성을 들여야 아주 가벼운 지팡이가 된다고 한다.
청려장을 짚고 다니면 중풍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 전해질 만큼 건강과 장수의 상징이기도 하다. 퇴계 이황선생이 사용하시던 청려장도 지금 안동 도산서원에 보관하고 있다 한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장수한 노인에게 왕이 직접 청려장을 하사했다고 전해지며, 이 전통이 이어져 지금도 매년 ‘노인의 날’이 되면 그 해 100세를 맞는 노인에게 대통령이 수여하고 있다.
나에게도 뒷산을 오를 때 늘 반려자처럼 들고 다니는 지팡이가 있다. 명목은 이른 새벽길의 호신용으로 들고 다닌다 말하곤 하는데 나만의 또 다른 깊은 뜻이 있는 지팡이다. 파울로코엘료의 산문집 ‘흐르는 강물처럼’ 을 읽다 노르딕워킹이란 이야기를 만났다. 작가는 스틱을 짚고 걸으면 운동효과가 좋을 뿐 아니라 관절의 부담도 줄여준다는 사실에 어느 날부터 스틱을 들고 다녔지만, 정작 스틱에 정신을 쏟느라 소중한 사색을 잃고 말았으니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시간들이었다고 회고한 글이었다.
책을 읽고 난 후, 산책을 즐겨하는 나로서는 운동효과가 좋다는 말에 현혹되어 잘 만들어진 쇠붙이 등산스틱을 기분 좋게 숲길에 찍으며 걸었다. 그러나 웬걸 기대했던 마음은 어느 한 순간 실망으로 번졌다. 금속성 스틱이 땅에 닿으면서 내는 소리가 몹시 거슬렸다. 이제 막 솟아 나오려는 새싹들이 움칠움칠 놀랄 것만 같았고, 고요한 숲속의 정적을 이유 없이 흔들어 놓는 이질감 때문에 스틱을 짚고 걷는다는 것이 내내 불안하고 불편했다. 10분도 채 걷지 못하고 스틱을 거두고 말았다.
부드러운 땅에 닿으면서도 제 소리만을 고집하며 탁 탁 내는 소리는 제 잘난 맛에 모두와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튀는 그런 얄미움이 느껴졌다. 문득 나무막대기를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숲에 널린 막대기를 골라 집으로 가져와서 조금 다듬어 지팡이를 만든 것이다. 나무 지팡이 끝에 닿는 땅의 감촉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소리마저 제 안으로 삼켜버리는 듯싶은 나무막대 소리는 숲속의 고요함을 건들지 않는 다정함이 있어 손잡이 부분이 반질거리도록 들고 다니고 있다.
현관문을 나서며 무의식적으로 들고 나서는 나무 지팡이가 참 편안하고 유용하다. 봄이면 행여 새싹이 돋아났을까 땅을 헤집어 보고 싶어 하는 내 손을 대신해 준다. 요즈음 같은 여름철이면 내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거미줄을 걷어내는데 그만이다. 가을이면 간혹 떨어진 밤송이를 뒤집어 보기도 한다. 겨울이면 나뭇가지들에 무겁게 얹힌 눈들을 탈탈 털어주기도 한다.
그런데 요즈음 이 지팡이의 높이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끝이 약간 휘어지니 길이가 서로 다른 양손의 지팡이가 되었다. 뿌리가 없는 나무막대임에도 제 몸의 힘이 다 빠져 나갔음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 여러 생각을 해 보건만 어쩌지 못하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곤 한다. 이런 내 마음 안에 어머니의 청려장이 깊이 스며든다. 솔직히 말하면 욕심이 난다.
청려장을 흉내 내고 싶어 요즈음 산을 오르거나 산책을 할 시 행여 잘 자라는 명아주가 있을까 눈 여겨 보지만 욕심을 낼 만큼 잘 자란 명아주를 만나지 못했다. 설령 잘 자라고 있다 하여도 눈에 띄는 곳이라면 잡초라 하여 무참히 뽑혀 나갈 것이다.
한갓 잡초에서 선택받아 훌륭한 지팡이가 될 수 있음은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그 조건들을 찾으려 열심히 눈을 크게 뜨고 다니노라니 재미도 있다. 내 몸 이제 늘그막이지만 내 안의 조건들도 열심히 키운다면 누군가에게, 혹은 그 무엇에라도 유익한 지팡이가 될 수 있겠는지 슬그머니 헛바람을 피워본다. 나로 하여금 욕심을 일게 한 좋은 지팡이를 지니신 우리 어머니, 스님으로부터 선택받으신 훌륭함으로 더 건강하시고 편안히 지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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