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다래
토요일 낮 12시, 치악산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고 돌아서는 길, 다소 지루함을 느꼈다. 오름의 힘듦을 이겨낸 뿌듯함을 가득 담아 내려오느라 더 이상의 바램은 없는 듯싶은 마음이다. 이제는 산의 특성보다 주위의 풀 나무들에 더 관심을 가지며 걷는 길, 자칫 급경사 내리막길의 헛디딤을 경험하며 놀라움을 삼키기도 하였다.
울창한 전나무, 잣나무, 소나무들은 산등성의 비탈길에 서 있으면서도 곧게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비탈진 곳에서 저렇게 곧게 서 있음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지금 내가 그 비탈을 타고 있으니 숨이 턱에 차오를 적마다 나무들을 바라보며 힘을 얻곤 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표면에 내 발을 직각으로 디딜 수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나무들은 자신들의 짙푸른 잎에 양분을 받으려고 초여름의 햇살을 모두 가로채고 있다. 그 덕에 나는 나뭇잎이 내려준 그늘 아래를 시원하게 걸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던가. 한번쯤 비유해 봄직한 초록의 향연! 이 모습들이야 말로 향연이었다. 그에 초대된 나는 그들이 내주는 싱그러움에 마냥 도취되어 저절로 흥에 겹다.
내 흥에 겨운 발걸음을 시샘이라도 하듯 다람쥐가 풀쩍 나타나 자로 지르니 내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다람쥐 자취를 따라 눈길을 보내지만 어느새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니 그 틈새에 나는 쉼을 가지기도 한다. 오늘 이 산의 모든 것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들의 향연을 베풀고 있다.
고도가 점점 낮아질수록 잡목들도 다소 섞이면서 울울창창하다는 느낌이 적어지면서 서로 얽힌 가지들로 숲의 풍성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짙은 초록의 물결에 잠깐 어지럼증이 일 것 같지만 곳곳에 보이는 흰색의 꽃들이 용케도 내 어지럼증을 잡아주고 있었다. 6월의 나무들이 유독 흰색의 꽃을 많이 피우는 까닭은 벌 나비들을 유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무성한 초록색 속에서 벌 나비들에게 잘 띄는 색이 하얀색이라고 한다. 나무들은 흰 꽃으로 그들을 불러 꽃가루 수정을 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한 아주 지혜로운 선택을 하고 있다. 화려한 빛들로 벌 나비를 유혹하는 꽃들도 있지만 초록사이에서는 흰빛이 가장 화려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듯, 어쩜 자신의 적성을 곧바로 직시하며 정진할 때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진한 초록빛 진실이 내 마음을 적셔준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려오는데 높은 나무의 초록색 잎 사이에서 흰 색의 무엇들이 무수히 나풀거리고 있었다. 무어지? 꽃인가? 꽃이 저리 움직인단 말인가. 한 자리에 서서 고개를 바짝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나비 떼였다. 이렇게 많은 나비 떼를 나는 처음 보았다.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그들은 내 마음을 몰라주고 이리저리 끊임없는 날갯짓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나무들은 흰 꽃을 피운 작전이 성공했구나!
높은 키 나무들 틈새에서 줄기를 뻗어 올린 한 나무의 잎들이 햇빛을 반사시키는지 유난히 반짝거린다. 꽃인가? 초여름 햇살이 너무 부시다며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그 옆을 스쳐 지나는데 아, 그건 개다래나무의 잎이었다. 나뭇잎 반쪽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으니 언뜻, 멀리 보면 꽃인 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다.
개다래나무는 잎 뒤에 아주 작은 꽃을 피운다. 너무 작은 자신의 꽃들은 벌과 나비를 불러들일 수 없었다. 나무는 그 꽃들 대신 벌 나비를 불러주기 위해 자신의 잎을 하얗게 변색시키며 꽃을 대신하고 있다. 그 덕으로 꽃들이 열매를 맺고 나면 잎은 다시 초록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아야 하는, 그래서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닌 것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그 이치를 누가 그들에게 알려 주었을까. 아마도 나무가 부모라면 꽃은 자신의 분신인 자식일 것이다. 자식을 위해 스스로 제 몸을 희생하는 모성의 본능은 우리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 본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나는 얼마만큼 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던가. 움츠러드는 마음이지만, 초여름의 숲이 넉넉함으로 안겨주는 참으로 값진 삶의 旅情이라는 선물을 덥석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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