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크게 주목 받고 있는 소설의 한 기법은 팩션(Faction)이다. 이는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합성한 신조어로써 역사적 사실이나 실재 존재했던 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붙여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를 가리킨다. 주로 역사소설의 대부분은 팩션이라 할 수 있고 바람의 화원 역시 팩션이다. 우리에게는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궁금하고 흥미로운 법이다. 누구, 누구의 스캔들에 갖는 관심은 요즈음의 쩡아 이야기처럼 바로 보이지 않아 모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고 팩션은 바로 이 호기심에서 비롯된 상상력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작가 이정명의 또 다른 소설 '뿌리깊은 나무'는 한글창제의 비화를 사실처럼 엮어 낸 소설이었다. 그 책을 읽으며 작가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그 관심은 바람의 화원이라는 책을 망설임 없이 선택하게 하였다. 더구나 천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천재들에 대한 동경과 매력은 늘 나를 끌리게 하기 때문이다. 화원이 화가를 뜻하는 말인 줄은 책의 표지에 영어로 painter 라고 쓰여 있어서 알았다. 책 중간 중간에 삽입된 그림들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고 무엇보다도 그 그림들의 속 이야기를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물론 조선 최고의 천재화가를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 좋았다.
신윤복은 조선 후기의 화가로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3대 풍속화가로 불린다. 궁중화원으로 화려한 경력을 가진 김홍도와 달리 신윤복은 '속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라는 말만 있을 뿐 역사 속에 남아 있지 않은 인물이다. <바람의 화원>은 조선 시대 최고의 풍속화가인 '김홍도'와 베일에 싸인 '신윤복'의 삶을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추리해나간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임금과 왕세자의 어진을 그려 중인계급인 화인(畵人)으로써는 최고의 영화를 누린 김홍도에 비해 신윤복은 천재화가임에는 틀림없으나 알려진 바가 전혀 없는 생을 살다 간 화가이다. 두 천재사이는 실제 나이 10년 정도의 의 차이가 있다 했는데 이 책에서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가 되어 한 시대를 풍미한다.
소설 속 신윤복은 김홍도의 친구인 서징의 딸로 서징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 후 여섯 살에 신한평의 아들이 되지만 그 누구도 그가 여자이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 당시의 풍속으로는 여자는 붓을 잡을 수 없고 그림도 그릴 수 없어 화원이 될 수 없지만 그의 재능을 일찍 알아본 신한평은 자신의 집안을 화원가문으로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은밀한 거래를 통해 그림에 천재적인 소질을 지닌 서징의 딸을 아들인 윤복으로 키운다. 천재는 천재가 알아본다 했던가. 도화서의 교수로 있는 김홍도는 틀에 박힌 도화서 양식에서 자꾸 벗어나며 자기만의 독특한 그림을 그려내는 제자를 보고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다. 제자를 경쟁자이자 같은 화원으로 대하는 윤복에 대한 그의 지극한 애정은 알 수 없는 연민의 정으로 흐른다.
이 글을 읽는 동안 극히 나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조금 서운했던 점은 우리가 익히 학창시절에 배웠던 김홍도의 천재성과 역량이 은연중 신윤복의 자질보다 낮게 평가되고 있는 점이었다. 물론 신윤복의 생에 맞추어진 글의 흐름을 감안하면 당연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점이 나로서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 되었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임금 정조를 끌어들여 그런의혹을 불식 시켜 준다. 정조는 두 천재한테 하나의 주제를 주고 그림을 그려 오라는 명령을 한다. 완성한 그림을 보고 정조는 두 사람의 차이에 대한 정확한 느낌과 그 차이를 인정해주며 아끼는 말로 나의 저울질을 부끄럽게 하였다. 실제 김홍도는 양반이 아닌 중인계급의 사람이었지만 연풍(?)현감을 지낸 적이 있으니 정조의 김홍도에 대한 사랑을 짐작할 수있다.
김홍도는 도화서의 격에 맞게 색(色)의 사용을 억제하고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강렬하게 그렸고 신윤복은 화려한 색으로 여인들의 고혹적인 아름다움과 표정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그리면서 같은 풍경, 같은 주제를 놓고도 각자 다른 개성으로 그림을 그렸던 조선 후기 두 천재화가의 그림은 말 할 수 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이 두 사람의 그림에 흐르는 정서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음은 시간에는 옛날과 현재가 있지만 사람의 바탕에 흐르는 정서는 옛날과 현재 사이에 아무런 틈이 없음을 그림을 통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리라. 내가 살지 않았던 먼 옛날의 사람들 중 천재로 알려진 신한평의 아들 신윤복의 흔적은 그림을 통해 알 수 있지만 그의 실체는 단 두 줄의 사실만을 남겨 놓고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그는 진정 바람의 화원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잡을 수 없는 바람에 실린 실체에 대한 호기심에 탄탄한 살을 붙여 이끌어낸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을 금 할 수 없다.
그리는 것은 보이는 것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그림은 그리움이며, 그리움은 그림이 된다. 라는 말의 여운이 머릿속을 맴돈다.
정조는 두 사람에게 우물가 풍경을 그려 오라 지시한다.
각자 그린 우물가풍경의 그림에서
우리는 확연한 개인 차이를 느끼며 감탄을 한다.
신윤복의 '정변야화'(왼쪽), 김홍도의 '우물가'(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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