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폭우에 사무실 바닥에 물이 찼었다. 그로 인해 보관서류들 일부가 물에 젖어 제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다행이 보존기한이 훨씬 지난 서류들이기에 폐기 처분하기로 하였다. 하나 서류들을 그냥 폐기하면 각종 정보들이 유출될 염려가 있기에 소각하기로 하고 물기 마르기를 기다리며 여태 창고 한 쪽에 쌓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근 7개월이 지난 요즈음 그 서류들을 조금씩 여유로운 시간에 소각처리하고 있다. 물에 불어난 서류들은 모습이 변형된 것은 물론, 불은 종이들이 서로 밀착된 상태로 말랐기에 분쇄기 처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태우고 있는 것이다.
페인트 통을 구해서는 사무실 옆 공터에서 서류들을 태우는데 활활 타 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노라니 한 생각이 스친다. 고등학교 시절 한 때 동생과 자취를 한 적이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해야 하는데 연탄불이 꺼져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간식을 챙길 여유가 없었기에 아침밥도 못하면 점심 도시락도 못 가져갈 판이니, 나보다도 동생이 더욱 걱정이 되면서 마음이 울컥해지곤 했다. 하여 주인집 아궁이를 찾아가 지난 참고서나 다 쓴 연습장등을 한 장씩 떼어 불을 지펴 밥을 했던 기억이 있다. 밥이 다 되기 전에 종이가 모자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조바심을 내곤 했었다.
태워야 할 종이들이 내 키보다도 높게 쌓인 것을 바라보자니 그 때 이런 종이들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혼자 빙긋 아쉬운 웃음을 머금는다. 불을 마주 바라보며 종이를 태우니 어느새 얼굴이 화끈 거린다. 온기가 느껴지니 괜한 아랫목 생각이 난다. 안온하고 정겹기 이를 데 없는 추억이 불길 따라 어른거린다.
저녁밥을 지을 시간이 되면 곧잘 부엌으로 불려가곤 했다. 쌀을 씻어 무쇠 솥에 얹혀 놓으신 어머니는 불 때는 일을 맡기곤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다른 반찬 준비를 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일을 좋아 했다. 농사를 짓지 않았던 우리 집은 볏짚보다는 나무나 장작을 주로 이용했던 것 같다. 나무 불쏘시개로 갈잎을 주로 사용 했는데 산에서 갈잎을 모아 나른 적도 있었다.
나뭇가지나 장작을 ㅅ자 형식으로 얼기설기 얹어 놓고, 그 사이에 갈잎을 놓아 불을 붙인 후, 입으로 후~ 불어주면 연기를 조금 내다가 환한 불빛을 발하며 불쏘시개는 제 몸을 태워 나간다. 나무들은 타다닥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불이 붙고 활활 타 오르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나는 부지깽이로 가끔씩 뒤적여 주며 나무들이 잘 타기를 도와주었다. 주황색 불빛을 바라보며 춤추는 불길의 모습을 바라보곤 하였다.
무쇠 솥이 밥물을 넘기고 꼬득꼬득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불길을 죽여야 한다. 센 불들은 일부러 불을 끄게 하여 다음에 또 사용을 한다. 아궁이에 남아 있는 잉걸불은 밥을 뜸들이면서 또 다른 일을 하는데 다름 아닌 고구마 굽기였다. 껍질을 알맞게 태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는 생각만으로도 군침을 돌게 한다. 참으로 불길만큼이나 마음을 따듯하게 해준다.
인류의 문명은 불과함께 진행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득 우리에게 불을 보내준 그리스 신(神)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하늘의 지배자인 제우스는 인간들을 미워하고 싫어했다. 인간들이 신에게 바치는 음식에 소홀했기 때문이란다. 그 벌로 제우스는 인간에게서 불을 빼앗아 가 버린다. 하지만 인간과 각별히 지내는 또 다른 신 프로메테우스는 신전 부엌에서 불을 훔쳐와 인간 세상에 나누어 주었다. 화가 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산의 바위에 묶어두고 독수리들로 하여금 그의 간을 찍어 먹도록 하였단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런 모진 고통을 받으면서도 인간을 도왔던 탓일까. 후세사람들은 프로메테우스를 인류의 은인이라 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까마득 먼 옛날의 이야기들은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속속들이 비춰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인간에게 이로움을 안겨준 신의 이야기에서 새삼 불의 소중함을 챙겨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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