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이 지난 이 맘 때쯤이면 봄바람은 투정부리고 햇살은 느긋하다. 느긋한 봄 햇살의 나른함이 그냥 정겨운 계절이다. 그 나른함 속에는 무언가 잡히지 않는 부드러움 정겨움 등이 아른거린다. 추운 계절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봄꽃들의 싱그러움 따라 일렁임은 언제 느껴도 좋기만 한 정감어린 감성이다.
우리 뒷산 양지바른 곳, 묘가 서너기 있는 곳에 봄이면 산자고가 무리지어 피어나곤 한다. 꽃 피는 시기가 되면 살금살금 찾아가서는 얼마만큼 피었는지, 새 순은 돋아났는지를 바라보곤 한다. 마치 꼭 감추어둔 보물을 한 번씩 꺼내보는 흐뭇함이다. 때론 묘의 주인이 나무라지 않을까하는 무서움도 들긴 하지만, 환한 모습으로 반기는 꽃을 바라보노라면 그 무서움은 싹 달아나 버린다.
산자고를 바라보면 어렸을 때 보아온 희미한 기억, 뚜렷하지 않은 기억들이 아련함으로 떠오르며 평온함을 안겨 준다. 밝은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제 빛을 발하는 산자고~
가느다란 줄기따라 흰색 봉오리조차 길고 날렵하게 올리는 모습이며, 가냘픈 자색 선으로 제 몸의 특색을 보여주는 꽃의 조화에는 참으로 기품이 어려 있다. 비록 여리디 여린 몸이지만 여럿이 무리지어 봄 동산을 이루는 그들의 모습에는 지난 겨울의 혹독함을 이겨낸 자랑스러움이 배여 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존재의 귀한 가치를 느껴보곤 한다.
꽃은 늙지 않는다는 말처럼 산자고들은 자신의 본질을 절대 잊지 않고 있음을 모습으로 보여준다. 우리 사람도 그러할까? 지금까지 지나온 세월 속에 내 마음의 본질은 얼마만큼 닳고 닳았는지, 비록 초라할지라도 선연한 그 빛 한 줄기만큼이라도 내 안에 남아 있는지를 산자고에게 물어본다.
山慈姑는 이름 그대로 산에 사는 자애로운 시어머니다. 사납고 무서운 시어머니일진대, 이렇게 자상하고 자애로운 시어머니를 상징함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바가 크다. 꽃말은 봄 처녀라 한다니 그 또한 꽃의 모습에서 연상할 수 있다. 가느다란 꽃대에 비해 큰 꽃송이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고개를 푹 숙이기도 하니 부끄러운 봄 처녀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자애로운 시어머니, 봄처녀, 예쁜 산자고 꽃은 예쁜 만큼 전해주는 의미들마저 정겹기만 하다.
산자고꽃을 바라보며 나는 또 다른 생각의 꼬리를 이어가곤 한다. 산자고새다. 산자고새는 뜸부기다. 이에 중국에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중국 사람들은 이 새가 울며 내는 소리 뜸북뜸북을 ‘행부득(行不得)’ 이라 하여 ‘갈 수가 없네’ 하며 운다고 여겼단다. 하여 뜸부기, 즉 산자고새는 그리움을 뜻하는 새라 한다.(#1) 그에 붙인 노래 산자고사(#2)는 떠난 임을 그리는 슬픈 노래이다. 우리의 동요 뜸부기의 가사에도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라는 노랫말을 더듬어 보면 얼추 그리움을 담아내고 있다 여겨지기도 한다.
부안 기생 계량은 매창(梅窓)이란 호로 더 잘 알려진 당대의 이름난 기생이다. 매창은 고을의 군수를 사랑했고 그 군수가 떠나자 그의 공덕비 아래에서 달밤에 산자고사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이 일은 엉뚱하게 허균과 연계되니 허균은 그 사정을 변명하는 계기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마음이 젖는다. 모든 사실을 젖혀두고라도 사랑하는 이를 못 잊어 사람이 아닌 공덕비석 아래서 노래를 부르는 그 마음에 그만 아릿해져 옴은 그의 신분에서 벗어난 인간의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듯한 양지에 앉아 산자고 꽃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상념들에 젖어보는 마음이 아릿하다. 산자고의 푸른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싶다. 꽃과 새와 노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의 아름다움에 내 매무새를 여며본다. 봄날이 안겨주는 선물이다. 잡을 수 없는 그 옛날 기억의 봄은 지나갔다. 하지만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찾아오는 봄은 기억의 끈을 함께 가져다준다. 기억의 끈을 가만히 잡아보는 나를 그 시절로 끌어주는 봄은 진정 내 마음의 마술사다.
(#1),(#2) : 미쳐야 미친다 中에서 인용
(#2) 산자고사(山鷓鴣詞)
-소정(蘇頲)
한 곡조 거문고로 자고새를 원망하니
거친 돌은 말이 없고 달빛만 외롭고나.
현산 땅 그때에 정남석 앞에서도
어여쁜 님 고운 눈물 떨군 적이 있었던가.
一曲瑤琴怨鷓鴣 荒碑無語月輪孤
峴山當日征南石 亦有佳人墮淚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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