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과 섬진강이 서로를 껴안고 돌아나가는 곳, 푸르른 제 그림자를 내려주며 물길마저 쉬어가게 하는 산과, 산을 풍덩 담구어 씻어주고도 맑음을 잃지 않는 강물이 아름다운 곳 화개장터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보듬고 있는 곳이다. 수려한 경관은 아니어도 만나면 만날수록 친밀감이 느껴지는 곳, 그곳은 또한 역사와 문학이 함께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백제와 가야국들이 서로 차지하려했던 섬진강유역은 왜의 침입도 잦은 곳이었다. 왜적들이 침입을 해오자 두꺼비들이 진을 쳐서 물리쳤다고 하여 두꺼비 섬(蟾)과 나루 진(津)을 따서 섬진강으로 불린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한편 문학적으로는 그 유명한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와 이병주 선생의 소설 ‘지리산’ 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나 김동리 선생의 단편소설 ‘역마’는 화개장터가 주 무대가 되고 있다.
지난주 하루, 친정어머님과 작은집 부모님을 모시고 산수유와 매화구경을 나섰다. 섬진강 재첩국을 잡수고 싶으시다는 부모님들의 뜻에 따라 화개장터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각각 취미에 맞는 곳을 찾아 장터를 구경하기로 하였다. 그곳을 갈 때마다 늘 찾는 곳, 대장간과 도자기 그릇 점을 언니와 찾아 나섰다. 때가 때인지라 사람들이 많았다. 그 틈새를 살금살금 다니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릇점 안에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는 투박하면서도 질감 있는 그릇들을 바라보며 내 마음을 저울질하다 확! 눈에 띄는 그릇 하나를 만났다.
세상에!!
밝은 잿빛에 약간 비대칭형 모양을 이룬 것부터 마음을 끌었는데 그 안에 새겨진 그림에 그만 혹하고 말았던 것이다. 제비꽃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호제비꽃! 제비꽃 중에서 가장 제비꽃다운 한 송이 꽃이 날렵하게 그릇 안에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어쩜 내 마음은 그만 그 그릇을 구입하라고 이른다. 딱 두 개만의 그릇에 제비꽃이 그려져 있었다. 그릇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제비꽃 그릇에 마냥 마음이 든든했다.
예쁘지만 단아하고 고운 색깔을 지녔으면서도 향기로 주위를 끌려하지 않는 소박한 제비꽃을 나는 참으로 좋아한다. 봄이라 하지만 아직은 찬바람에 몸이 움츠려지는 즈음, 햇빛이 자랑자랑 머무는 산기슭 양지쪽에 조심스레 잎을 내밀며 꽃피우는 제비꽃은, 꽃이 품은 서러운 사연에 눈시울을 젖게 한다. 적어도 제비꽃은 나에게 그런 존재다. 그래서일까 이름도 다양한 제비꽃을 만나면 유독 반갑고 정겨워진다.
그리스 신화에 제비꽃이야기가 나온다. 제우스신이 아름다운 소녀 이아를 사랑하게 되자 제우스의 부인 헤라는 질투가 나서 이아를 소로 만들어 버렸다 한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소로 변한 이아를 바라보는 헤라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이아가 먹을 풀을 만들어 주는데 그 풀이 바로 제비꽃이며, 그리스 말로 이온(ion)이라 하고 영어로는 바이올렛(violet) 이다.
우리의 이름으로 알려진 제비꽃이란 이름은 강남으로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즈음에 피어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또 다른 이름인 오랑캐꽃이란 이름은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춘궁기 시절에 북쪽의 오랑캐들이 식량을 구하려 남쪽으로 쳐들어오곤 하는 시기에 피어나는 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그 조그마한 꽃 한 송이에 붙여진 이름은 많기도 하거니와 품은 사연이 서러울진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또 다른 이름은 ‘여의초“이다. 한자로는 如意草, 의미 그대로 뜻과 같이 라는 뜻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제비꽃을 그려 넣은 그림을 건네주면서 ‘만사형통하소서’ 라는 마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이는 제비꽃의 모양에서 유래했는데 곧게 뻗은 줄기가 꽃봉오리를 만나 살짝 구부려진 모습이 마치 효자손 같다하여 부여한 이름이라 한다. 등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효자손처럼 제비꽃의 모습이 그러하니 이는 분명 모든 일을 쉽게 해결해 주리라는 상징성을 조금은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이 봄, 산기슭에 조용히 피어난 것만으로도 즐거움인데 그에 모든 일을 쉽게 해결해 주고자하는 꽃이라니… 그릇 안에 다소곳이 피어난 제비꽃의 염원은 예부터 이 봄날의 모든 것을 만사형통으로 이끌어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일찍이 두꺼비들로 하여금 왜적을 무찌르게 하였고, 천혜적인 자연조건에서 무수한 이야기들을 키워주었고, 흐드러지게 매화를 피어나게 하고 있으니 정말 작은 제비꽃 한 송이의 기원이 예사롭지 않다.
제비꽃 뒤를 따라 이 봄의 천지가 마냥 환하게 줄달음치는 것을 이제 알겠다. 화개장터에서 만난 그릇 안의 제비꽃 역시, 그곳을 찾아오는 상춘객들의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기원을 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로 변한 이아는 못다 이룬 사랑의 염원을 제비꽃에 담아 후손에 길이 전해주고 있음이다. 내 이 길한 마음을 조금만 달라고 부탁하는 마음으로 꽃이 그려진 예쁜 그릇을 취했음이다.
제비꽃 그릇에 내 이루고자 하는 일을 담아두고 정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싶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여 놓고도, 뽐냄 없이 때 맞춰 방긋거리는 꽃의 모습에는 모든 일을 수월케 하는 신비로움을 품고 있었다. (1104)
'내맘의 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초록에 깃든 이야기 (0) | 2013.04.13 |
---|---|
불을 지피며 (0) | 2013.04.11 |
봄동산의 산자고 (0) | 2013.03.26 |
희망을 안겨주는 솟대 (0) | 2013.03.18 |
내 마음안의 망우대(忘憂臺) (0) | 2013.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