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무던히도 내리는 눈이다. 이른 아침 창밖을 바라보니 아파트 광장에 나란히 늘어선 차들의 지붕위에는 눈들이 고봉으로 쌓여있다. 고만고만한 폼으로 추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평소보다 조금 두툼하게 옷을 차려입고 현관문을 나서니 눈이 부시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니 기상이변이란다. 자연이 지닌 순리의 흐름을 순간순간 끊어지게 하여 이변을 낳게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들 탓일 것이다. 허물고 더럽히며 괴롭히니 자연은 저절로 순서를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다.
눈 덮인 산은 참으로 고요하다. 산 위로 오를수록 이상하게 주위가 더 밝아진다.
‘어쩜, 달이 떴나? ‘ ‘아닌데… 눈을 머금은 하늘은 잿빛일 뿐인데….’
하늘을 바라보며 의아한 마음으로 내 몸을 한 바퀴 빙 돌려보아도 하늘 그 어디에도 달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밝음의 정체는? 아! 그렇구나! 눈빛이었구나! 약간 흐릿한 하늘색과 산등성이를 뒤덮고 있는 하얀 눈의 조화는 흐린 듯, 밝은 듯, 애잔한 빛이 감도는 음예공간이었다. 눈빛과 눈 내리는 소리로 이루어진 음예공간은 평온함을 안겨준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꼭 그 만큼의 빛을 발하면서도, 그 빛은 그림자를 내려 주지 않았다. 발하는 빛은 실체를 만나면 그림자를 내려준다. 행여 눈빛에 내 그림자가 드리워졌나 몇 번이나 둘러보았지만 없었다. 해, 달은 사물의 그림자를 만들어 주면서 제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는데, 눈빛은 제 빛을 내 보이면서도 사물의 그림자를 보여주지 않았다. 스스로 녹아내리는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기에 제 자신을 굳이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사물의 그림자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위에서 내려주는 빛이 아닌, 밑에서 올려주는 빛이기에, 그림자를 담아줄 공간이 없기에, 위에서나마 그림자를 담아 줄 하늘이 너무 멀어 닿을 수 없는 곳이기에 그냥 스스로 사그라지는 마음의 빛인가 보다. 하얀 눈빛은… 호젓한 산속의 눈길에서 나는 그림자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가 없는 법, 그림자 없는 나의 실체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지닌 역량이, 능력이 그 어느 곳에 닿을 수 없는 것이라면, 눈처럼 사라지는 빛이라면 차라리 내 자신을 나타내는 타인의 그림자를 만들지 말지어다.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으리라.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역량만큼의 은은한 빛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봄이 더 나을 것이리라고 오늘 하얀 눈빛은 알려 주고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내 실체를 찾는 마음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진다. 흰 눈은 그림자 대신 나를 그대로 수 놓고 있었다. 그림자를 내릴 수 없어 자신을 나타내지 못함은 체념이 아니라 안으로 숨겨야 했던 열망이었을까. 날씨가 따뜻해지면 스스로 사라져야 하기에 아쉬움도 있었나 보다. 하얀 눈은 하얀 무명천이 되어 나를 수놓고 있었다. 바람에 무참히 떨어지는 솔잎들을 받아 촘촘히 제 몸에 수를 놓으며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메말라 버린 풀 한줄기에 새 생명을 불어 넣으며 수를 놓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의 난치는 솜씨보다도 훨씬 멋있게 푸른 산죽을 자신의 몸에 그어놓고 있었다. 예술적 승화이다.
하얀 눈 위에 마음껏 멋을 부리며 더욱 예쁜 모습으로 수놓아진 나와 사물들의 행복한 모습은, 저절로 사라져야 하는 마음을 그나마 채울 수 있는 눈의 행복일 것이다. 남을 행복하게하면 나도 즐거워지는 법. 하얀 눈은 금세 사라질지언정 솔잎과 메마른 초목과 산죽의 기억에는 자신을 돋보이게 바탕이 되어준 눈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아, 나도 내 행복한 마음을 받아 낼 무명천 한감을 구해야겠다. 그 무명천위에 내 마음 안의 행복을 수놓아야겠다. 히얀 눈이 펑펑 내리는 늦은 겨울 밤, 식구들이 모두 잠들어 고요한 밤에 수를 놓고 싶다. 식구들 모두 아늑한 공간에서 편히 쉬고 있음은 더 없는 행복이다. 지금도 창 밖에서 내리는 눈들은 자신의 행복으로 수를 놓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방 안에서 내가 느끼는 행복감으로 수를 놓을 것이다.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는 행복을 지니며 지금만큼의 평온함으로 올 한 해를 지켜 나가고 싶다.
눈은 코로 맡아서 느껴지는 향이 아닌 귀로 들을 수 있는 문향(聞香)이 있어 운치가 있다. 눈이 내린 무언의 풍경과 교감할 수 있음은 행복이다.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고 눈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내 마음은 따뜻해진다. 좋은 풍경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적에 나는 행복해진다. 하얀 눈은 스스로 사그라지는 몸으로 영원히 간직할 아름다운 방법을 내게 알려주었다.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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