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가운 가을날의 햇빛은 유난히 투명하였다. 양귀비가 즐겨 먹었던 과일 여지는 단삿빛이었다고 하던가. 햇볕을 걸러내는 담쟁이는 단삿빛으로 제 몸을 불사르며 바람을 움켜쥐고 있다. 벽을 타기위해, 나무를 오르기 위해, 줄기에 숨겨 키운 흡반은 어차피 비켜난 운명의 길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람을 대신 움켜쥐었다. 바람에 살짝 흔들리며 내 눈을 유혹하는 담쟁이덩굴! 바람 앞에 놓인 운명이라면 충실하게 바람을 따라 운명과 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알려준다.
그렇게 한 시대를 살아가며 그 시대를 장악했던 거먕빛 영혼을 지닌 단삿빛 고운여인들의 모습을 만났다. 입동이 지나고 소설이 다가오면 국화향기는 더욱 그윽해지며 결실의 계절을 마무리 해 준다. 그 향에 저절로 정리되어가는 우리의 마음이듯, 여러 예술단체들 역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각종 공연을 보여주며 결실을 맺는다. 지난 16일 우리지역의 최은정 무용단이 거먕빛 영혼이라는 주제로 논개를 공연하였다. 우연일까? 22일에는 하늘무용단이 소리문화의전당에서 만유의 꽃이라는 주제로 황진이를 공연하였기에 모두 관람하는 기회를 가졌다.
극히 내 개인적인 관념이지만 나는 예술가들을 참 부러워한다. 그들은 다 천재처럼 인식 되는 까닭으로 그들의 창조적인 생각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듣고,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글과 음악이 시간을 요하고, 그림과 건축은 장소(공간)를 요한다면 무용은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예술인만큼 종합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에 참 어렵게 접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인간 내면에 잠재한 감정을 몸짓으로 풀어내는 비슷한 주제의 연이은 무용공연 관람의 기회가 우연만은 아닌듯한 착각에 빠져본다.
황진이와 논개, 두 여인은 생몰연대조차 확실하지 않은 500여 년 전 조선시대의 기생이라는 천한 신분의 여인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여인들을 학창시절에는 교과서에서 만났고, 성인이 되어서는 노래, 영화, 연속극, 뮤지컬, 또 이렇게 무용으로 수없이 반복하여 만나고 만난다. 그럼에도 만날 때마다 늘 새로움과 호기심을 갖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와 숨결이 담겨있는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다. 그 전통문화의 정신 속에 억눌렸던 감정을 몸짓으로, 소리로, 글로 표현하며 그들이 그렇게 처절하게 지켜 나가야 했던 삶의 역정을 돌아볼 수 있는 까닭이리라.
단지 천한 태생이라고 구분 짓는 제도에 발이 묶여 자신의 의도와 달리 선택된 기생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끝없는 인내와 노력으로 냉대 받은 천함을 예인의 길로 바꾸어 걸어갔다. 그들의 삶은 참으로 진한 국물처럼 우리의 마음을 훌훌 씻겨 내려 준다. 그 근간에 자리한 사랑, 우리 인간의 영원한 숙제인 사랑의 마음은 당당하고 용감할 수 있는 근본의 힘이었다. 고운 여인들은 사랑이란 스스로 하는 수고로운 일이기에 사랑의 열정은 반드시 공경심으로 남아야 한다고 알려 준다.
논개는 사모하던 최경희장군의 죽음에 피울음으로 절규하며 왜장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든다. 황진이는 출생의 비밀이 탄로되면서 혼사길 마저 막힌다. 그런 연유에는 황진이를 사모하던 몸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여인은 그런 자신들의 삶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 우회하여 자신에게 지워진 삶의 멍에를 벗겨내고자 자신과의 인내와 싸우며 이겨낸다. 기생으로써 혼신의 정열을 다하고 이슬처럼 스러지고 싶을 뿐이다. 인생의 기쁨이란 얻고자 하는 어떤 욕망을 채운 만족감이 아니라, 온갖 고난과 고뇌 속에서도 욕망을 이겨냈을 때 얻는 성취감이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 선각자들 이었다.
흡반을 내릴 곳을 잃어버린 담쟁이덩굴이 허공의 바람을 대신 움켜쥐듯,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뚫고 통과하며 살아간 단삿빛 두 여인들의 혁명적 삶은 우리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이 시대의 한 요소로 살아가는 나의 마음 깊은 곳에 그들의 충절과 기개를 품어보기를 소원하며 무용수들의 몸짓에 따라 내 몸을 자꾸 뒤채어 본다. (0911)
# 단삿빛 : 딸기빛이 도는 붉은색
소설 황진이(전경린 저) 1권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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