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투명하다.
멀고 가까움의 선마저 더욱 뚜렷하게 도드라져 보이는 산빛은 한결 드높아진 하늘빛과 맞닿아 맑음을 빚어내고 있다. 그 맑음에 섞여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도 맑디맑다. 가을은 신명 가득한 저희끼리 놀 것이지 왜 나를 자꾸 유혹하는 것인지… 서류발송을 핑계 삼아 우체국까지 걸었다. 가을은 누구랑 친구 하며 놀고 있을까?
건물의 담 그늘이 서늘하다.
여름 같으면 얼른 들어섰을 그늘이었지만 금세 배반자가 되어 햇살 아래로 발을 옮겨 바라보니, 담 그늘에서는 아직도 방가지똥이 꽃을 피우고 서 있다. 잎에 돋은 가시가 행여 찬 기운을 막아내는 방패막이라도 될까. 이름마저 우스꽝스러운 멀쑥한 허우대에서 기척 없는 몸짓이 보인다.
큰 도로에 나서서 신호를 기다린다.
건너편 길의 가로수 벚나무 밑을 걷고 싶었다. 빨강, 약간 노랑, 갈색을 띠고 있는 여름 낙엽들은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우리 얼굴의 검버섯 피듯 동글한 점들이 박혀 있기도 하다. 똑바로 누워있기도 하고 엎어져 있기도 하다. 옆으로 비스듬히 내려앉았는가 하면 서로 포개어 있기도 하다. 벚나무는 왜 이렇게 빨리 잎을 떨구는 것일까.
잔바람에 날려 차도로 떨어진 낙엽들은 씽씽 달리는 차 꽁무니를 우르르 따라나선다.
우리 어렸을 적 소달구지 뒤를 따라가다 얼른 몸을 올리며 엎드려 배를 걸쳐놓고 타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때의 우리처럼 저 낙엽들도 빙그르르 제 몸을 굴리며 까르르 웃고 있을까. 그 웃음소리가 맑은 하늘을 가르는 듯싶다. 잡힐 듯싶은 그들의 웃음소리에 내 발걸음이 더욱 가볍다.
사진관 앞은 고요하다.
사진관임을 알리는 표지판에서 매일 똑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예쁘다. 나도 지금 고운 햇살을 받으며 걷고 있으니 저리도 해맑은 모습이 되었을까. 살그머니 들어가 매무새를 가다듬고 조명을 받으며 앉아 있고 싶다.
문을 열어 놓은 중국음식점 앞을 지나니 냄새가 나를 자극한다.
그렇지, 지금 점심시간이구나. 삼삼오오 앉아서 음식을 먹거나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설핏 바라보니 문득 가을 별미라도 먹는 듯싶다. 주인 내의 바쁜 움직임에 점심 먹고픈 가을도 멈칫 들어서지 못한다..
꽃집 앞을 지난다.
아, 꽃집에서 보도에 내어놓은 화분들에는 베고니아가 국화보다도 더 풍성하다. 옛사람들이 추해당화(秋海棠花)라는 꽃으로 노래를 불러주었던 꽃이다. 가을 해당화는 사랑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옛날에 어떤 처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기로 굳게 약속을 했다.
눈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소식이 묘연하여지자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서성이며 하염없이 한숨과 함께 눈물을 떨구었다. 그녀의 눈물이 떨어진 곳에서 아주 고운 꽃이 생겨났는데, 그 꽃이 바로 추해당화였단다. 단장화(斷腸花)라고도 한다. 단장화란 말은 애끊는 꽃이란 뜻이다. 기다리며 얼마나 많은 애를 끊었을까. 가을하늘처럼 시린 이야기다.
농협 앞 좌판을 벌이고 있는 아낙이 아는 체를 한다.
기분이 좋아진다. 몇 번 싱싱한 푸성귀를 샀음을 기억하는 걸까? 아니면 오가는 사람 모두에게 보내는 친절함일까. 아무렴 어떨까. 이 계절의 선함 속에서 누구라도 선함을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인데 그 마음 표현함에 무슨 이유가 있을까.
우체국에 닿았다.
가을을 멀리 보내는 낭만이 사라진 가을 우체국이다. 우체국에 들어서면 온통 무언가를 보내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편지가 사라진 요즈음은 큼지막한 상자에 무언가를 담아 보낸다. 보내는 마음에는 받는 사람의 행복한 웃음을 먼저 받는 듯싶다. 이 가을이 가기 전 누군가에라도 이 가을이 전해주는 선함을 보내고 싶다.
가을은 모든 것을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한다.
모든 것을 거두어들이고 내년을 준비하는 시절이어서 일 것이다. 아쉬움 가득한 마음에 조금 덜 서운 하라는 듯, 맑음만을 보내주는 가을이 참 좋다. 이토록 선한 계절을 준비하느라 지난여름 그토록 더웠나 보다. 점 하나 마음에 새기는 짧은 점심시간 동안 걸어서 만난 가을에 내 시름을 덜어본 참 좋은 가을 한낮의 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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