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단상(短想)

겨울 산길의 겨우살이

물소리~~^ 2024. 1. 15. 22:23

 

 

 

한겨울의 맑은 날씨를 나는 곧잘 ‘명징하다’는 표현에 빗대어 말하곤 한다.

깨끗하고 맑다는 뜻이지만

나는 이에 날카로운 추위라는 표현을 섞어

'에이듯 춥지만 깨끗하고 맑은' 뜻으로 사용하고 싶은데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

 

명징한 날, 일요일에 조금 멀리 한겨울의 숲을 만나러 갔다.

맑은 날이지만 스치는 바람결은 나를 움츠리게 하니 한겨울 기세가 등등하다.

파란 하늘 아래의 명징한 겨울 산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출입 통제했는지 적막함이 가득하다.

내가 걷고자 하는 산길옆의 조그만 계곡에는 적막감에 활기를 불어넣듯, 아니

마치 봄을 품은 듯싶게 맑은 물이 얇게 흐르고 있다. 봄이라니~~~

순간 빠른 세월의 무상함에 뜻 없이 편승하고 있는 내 자신에 마음이 잠깐 어두워진다.

 

나는 길가의 푸른 싹이 보이기라도 하면 봄꽃일까? 하며 시선을 거두지 않고 걸었다.

이상 기후를 만날지라도, 추워도, 눈이 와도, 비가 내려도

한번 꽃을 피우려는 자세에 몰입하면

기어이 피고야 마는 꽃의 모습을 보노라면 나는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

하지만 지금 시절에 복수초나 변산바람꽃을 기대하는 내 마음이 너무 방정맞은 거겠지.

심호흡을 하고 시선을 위로 올리는 순간 나는 어쩜! 하며 깜짝 놀라는 마음이었다.

 

 

꽃 대신 나무 마다에 동글동글 달려있는 겨우살이를 보았던 것이다.

아니!! 이곳에 웬 겨우살이가 이토록 많은 걸까.

이제는 하늘만 바라보고 걷는다.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아래의 겨우살이를

목이 아프도록 얼굴을 쳐들고 바라보노라니 참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겨우살이 모습 사진을 가까이 찍고 싶어 목표물을 정하고 그곳에 이르면

그 겨우살이는 나에게서 도망치듯 달려갔는지

어느새 나무 끝 하늘 높이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기를 몇 번~

근접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겨우살이들에게 그냥 이야기를 청해 본다.

 

내 눈에는 예쁜 새집 같기도 하고, 겨울을 담은 둥근 바구니 같기도 하고

겨울이 잠깐 쉬어가느라 나뭇가지에 텐트를 쳐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친숙한 겨울 산길을 걸으며 낯선 새로움을 만나고 보니

내 생각은 또다시 하늘 위를 맴돈다.

 

▲ 높은 나무가지에서 살아가는 겨우살이

 

겨우살이는 겨울에만 사는 것이 아니다.

사시사철을 푸른 잎을 달고 살아가는 상록성이다.

다른 계절에는 나무들의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나무의 빈 나뭇가지를 붙들고 연녹색을 띤 참모습으로

겨울이라는 추운 계절에 돋보이기에 겨울을 살아가는 나무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겨우살이는 잎을 가지고 스스로 광합성을 하면서

나무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반(半) 기생식물이라고 하는데

기생 생물에게 양분이나 서식지 따위를 제공하는 기주나무로부터(주로 참나무)

물은 물론, 여러 주요 양분을 염치없이 많이 가져가기에

완전한 기생식물이라 불러도 겨우살이는 할 말이 없을 것이라 말하니

'나도 열매를 새들에게 먹이로 제공하고

사람들에게는 좋은 성분을 나누면서 겨우 겨우 살아간답니다' 라며 겨우살이가 말한다

 

진정 우리 사람들은 몸에 좋다 하여 겨우살이를 채취하고 있으니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식물과의 보이지않는 경쟁, 협력관계의 연결성이 참으로 신비롭다

 

 

유럽에서의 겨우살이는 낭만적인 존재다

크리스마스 때 초록색 잎과 빨간 열매가 달린 겨우살이를

현관문에 걸어 놓는 풍습이 있는데

이 겨우살이 아래에서는 이성에게는 키스를 해도 된다는 얘기가 있다.

한 영화에서도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니

나는 지금 걸으면서 동과 서, 어느 쪽 이야기에 더 마음이 쏠리고 있을까.

 

 

                              

▲ 몇 년 전에 찍은 겨우살이 사진

 

나의 든든한 기주나무였던

울 어머니의 잎이 다 떨어진 버린 황량한 나무에 내가 매달려 있는 것만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는 그리움이지만 허전함은 지울 수 없다.

내가 뿌린 내리던 기주나무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내가 이만큼 살아갈 수 있음은

어머니라는 든든한 기주나무가 있었기에 가능했지 싶은 심정을 

겨우살이를 바라보며 하소연 해본다.

 

혹시라도 우리 아이들이 훗날 느낄 이런 쓸쓸함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을지...

이 허전하고 외로운 나의 마음을 다잡고 살아야겠다.

저 너머 산 아래에 계신 어머니를 속으로 불러보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