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단상(短想)

목소리를 듣고....

물소리~~^ 2023. 12. 24. 11:57

 

▲ 노박덩굴

 

 

동짓날이 지나면서

낮의 시간 길이와 밤의 시간 길이가 서로 자리를 바꾸느라 뒤척이는지

하늘에서는 눈이 며칠 계속 내리고 있다.

우리 조상님들은 낮의 길이가 길어지는 동지 다음날부터 새해라고 믿었다고 한다.

이런 절기상 의미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약해지고 있으니

낮과 밤도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느라 잠시 혼란스러운지 눈을 자꾸 흩뿌리고 있다.

 

우리 지역에 눈이 아주 많이 내린 날,

저녁 9시 뉴스 시간대에 지명과 함께 소개되었나 보았다.

나는 tv를 그리 자주 시청하지 않기에 못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두 번인가 받고 또 전화가 오는데 발신자가 ‘고모’라고 뜬다.

 

난 당연히 아이들 고모(우리 시누이)인 줄 알고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대뜸 ‘애, ** 야’ 하며 말을 시작하는데 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했던 시누이시라면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아닌데? 의아심이 생김과 동시에

목소리 톤에서 아하! 부산에 거주하시는 우리 친정 고모님이라고 얼른 알아차렸다.

나하고는 띠동갑이시고

울 어머니께는 하나밖에 없는 시누이여서 어찌나 잘 챙겨주셨는지 모른다.

자식들인 우리보다 더 먼저, 많이 챙겨주신 고모님이신 것이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고모는 ‘나한테는 어머니 같은 분이셨다’며

정말 서럽게, 서럽게 우시는 모습에 우리 모두 숙연해지고 말았던 시간이었었다.

 

그 고모님이 우리 지역에 눈이 많이 내린다는 뉴스를 듣고 전화를 주신 것인데

나는 시누이님으로 생각하고 준비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가

얘, ** 야 하는 말에 순간 당황하여 얼버무리고 더듬거리다가

아, 우리 친정 고모님이라고 빨리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목소리를 듣고서였다.

 

우리 고모는 눈이 많이 왔다는데 괜찮으냐며 물으신다.

나는 도심이어서 그리 큰 불편은 없었지만 운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아 보여

아침에 한 시간쯤 걸어 사무실에 갔다고 하니 고모님 목소리에 금세 화색이 돈다.

걱정하시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부산은 눈 구경하기 힘든데 그렇게나 눈을 맞으며 걸었다니 좋았겠다! 하시면서

천진스럽게 웃으시는 것이다.

고모 특유의 웃음소리에 정이 가득 스며있으니 나는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처음에 얼버무린 내가 우습다.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나는 두 분을 혼동하며 소통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드니 민망하기 그지없다.

시누이님한테는 발신자 표시를 보고 준비된 마음으로 임했지만

목소리로 알아차린 우리 친정 고모한테는

순간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내 감정을 섞어 말하고 있었으니

목소리는 그 사람만이 지닌 특징임은 변할 수 없는 진실인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한 사람이 자신을 알리려는 징표에는 신분증, 명함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런 징표는 얼마든지 위조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하지만 신체적인 지문이나 목소리는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온전한 징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니

목소리도 충분히 그 사람의 신분증도 명함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문득 음악 속에 나오는 목소리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비제의 오페라 ‘진주 조개잡이’에 나오는 아리아 ‘귀에 익은 그대 음성’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다.

 

▲ 인터넷에서 가져옴

 

지금의 스리랑카인 실론섬의 진주조개잡이들은 브라만교 승려의 상징적인 보호를 받는다.

그곳의 순결한 여사제 레일라는 사람들이 진주를 캘 때

바위 위에서 조개잡이들을 보호하는 기도를 올린다.

그 섬에 살고 있는 두 청년 주르가와 나디르는 모두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두 청년은 한 여인으로 인해 우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굳게 약속하고

나디르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섬을 떠난다.

시간이 오래 흘러 섬으로 돌아온 나디르는 레일라의 기도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흔들린다.

나디르는 사랑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레일라에게 환희의 로망스 ‘귀에 남은 그대 음성’을 바친다.

만나지도 못하면서 들려오는 음성만으로도 그녀임을 알고

예전에 그녀를 보고 느꼈던 감정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자 주르가도 기도를 드리는 동안

순결을 지켜야 하는 금기를 깨고 레일라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결국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을 들키게 된 레일라와 나디르는 화형 당할 위기에 빠진다.

주르가는 먼저 약속을 어긴 나디르에게 향한 질투심을 억누르고

처형 직전 이들을 구해준 뒤 제사장과 마을 사람들의 칼을 맞고 쓰러진다.

 

 

이 오페라에서

나디르는 마을에 되돌아와서 레일라의 목소리만을 듣고

간절한 목소리로 귀에 익은 그대 음성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압권이다.

어느 가수가 부르던 이 순간의 느낌을 잘 표현하는 것이 최고의 찬사다

레일라의 음성도 좋지만

그녀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진정성과 간절함이 묻어나야

청취자들도 함께 동화될 수 있을 것이니 목소리의 중요함을 새겨 본다.

 

▲ 부엌창으로 바라 본 뒷산 설경

 

눈이 하얗게 쌓인 창문 너머의 뒷산을 바라보며

컴으로 듣는 아리아에 심취해 보면서

되지도 안은 내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러본다.

잠시나마 내 안의 흥을 돋워 보며

나만이 지닌 나의 또 다른 인식표를 점검해 보는 크리스마스이브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