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고추장을 거의 다 먹고 이제 작년에 담은 고추장을 헐어야 한다.
지난해 10월에 담은 고추장이니 근 6개월 동안 햇살 좋은 날이면
고추장 항아리 뚜껑을 열어주면서 맛있게 익어가라고 속엣말을 해 주곤 했다
어제 아침 다시 항아리 뚜껑을 여니 망사 망 안으로 무언가가 보인다. 무어지?
아니! 손톱 크기만큼의 하얀 곰팡이가 두 군데 피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여태 이런 적이 없었는데.…
놀라는 마음으로 또 다른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았지만 아주 깨끗하게 잘 지내고 있다.
같은 고추장을 항아리만 달리 보관했을 뿐인데 왜 그럴까 걱정되는 마음이었지만
두 군데의 곰팡이를 걷어 내고 조금 기다려 봐서 다시 피면 냉장고에 옮겨놓을 것이다.
우리 아파트는 동남향이어서 종일 간접 햇빛이 드는 곳이다
하여 식물들도 잘 자라고 있다고 믿는 터
내가 이집트에 다녀오는 동안 문을 열어두지 않아 공기 소통이 부족해서 그럴까?
그렇다면 다른 하나도 그래야 하는데 왜 괜찮지?
자리 영향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우리 조상님들은 고추장이나 된장이 발효되는 과정에
표면에 하얗게 피는 곰팡이를 ‘골가지’라고 하였다.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 나는 의아했다.
보기에 혐오스러워 걷어 내고 마는 곰팡이에게 골가지라는 예쁜 이름이 가당키나 할까?
하여 그 이름의 연유를 알고 싶어 사전에 물어보니
‘골마지’의 방언이라는 해석이 달려 있다.
다시 골마지라는 말을 찾아보니
‘간장, 술, 김치 따위의 물기 있는 식품의 표면에 생기는 곰팡이 같은 흰색의 물질.’
이라고 설명해 준다.
하니 골가지는 아마도 특정 지역에서만 불리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골마지는
고추장이나 된장이 좋은 빛깔과 좋은 맛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나쁨을
숙성의 과정에서 뱉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릇 나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표정으로 다 나타나듯,
좋은 맛과 빛으로 남기 위해 오랜 시간 참고 견뎌내야 했던
고통의 나쁨을 겉으로 뱉어내야 했을 것이다.
우리가 먹어야 하는 신성한 먹을거리에 나쁨을 나쁨이라 말하지 않고
역설적으로 곱게 표현했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서 나온 이름 골마지는,
곧 우리의 마음속에 지닌 골마지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생각지도 않은 일을 당하거나 억울함에 직면하면
머리가 하얗게 된다든지,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표현을 한다.
나는 그 순간에 우리의 마음 골마지가 피어나는 현상이라고 빗대어 생각했었다.
나에게 닥친 어려움과 고통을 삭히고 삭혀 마음 골마지로 피워내면
버릴 것은 버려지고 숙성된 진국의 마음만이 남을 것이지 않겠는가.
그러고 나면 그런대로 또 살아지는 것이 우리의 삶의 순환이지 싶다.
엊그제 언니에게서 사진 한 장이 왔다.
울 어머니 집 베란다에서 자라던 영산홍 화분이었다.
해마다 풍성한 꽃을 피워 우리의 관심을 받곤 했던 화분이다.
꽃이 피면 울 어머니는 우리 모두에게 사진을 보내게 하시며 좋아하셨는데
어머니께서 요양병원으로 가신 후
시름시름 죽어 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했는데
그 와중에 새로운 가지 하나가 올라오더니 올해 드디어 꽃을 피운 것이다.
주인을 잃은 슬펐던 나쁜 기운의 모든 것을 버리더니 2년 만에
이제 새롭게 피어남을 바라보노라니 그냥 뭉클해지고 말았다.
어제 토요일은 울 어머니의 면회일~
오롯이 4형제들만 어머니를 찾아뵈니 ‘오늘은 진국들만 왔구나!’ 하신다.
이제 어머니도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셨는지 편안해 보이시니 적이 마음이 놓인다.
그동안 울 어머니도 당신의 몸 불편하심에 얼마나 속을 끓이고 계셨을까.
어머니 집 베란다의 영산홍이 나쁜 기운을 모두 버리고
좋음으로 꽃 피운 마음을 전해주었을 것만 같다.
아! 그렇다면 마음의 근심 걱정은 꽃가지로 피어나는구나!!
해마다 고추장을 담아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면
아들 준다고 꼭꼭 숨겨 두시던 어머니 생각에
항아리 하나의 고추장 모두를 나누어 담아 언니, 동생들에게 주니
집에 도착 후 형식적인 인사말이겠지만 모두 맛나다고 톡을 보내온다.
울 올케
“형님~ 고추장 겁나 맛있어요 상추쌈 많이 먹을 것 같아요" 한 답을 보니 괜히 울컥해진다.
오늘 일요일 아침
베란다에서 사라진 고추장 항아리 하나의 자리가 허전해 보인다.
화분 몇 개를 움직여 그 자리를 채우고 청소를 마치고 밖을 보니
아! 우리 동네 앞산의 풍경이 참으로 어여쁘다
나무들이 저렇게 둥글게 둥글게 자라고 있음은
서로 이웃한 다른 나무들의 영역을 배려하는 까닭이란다
그러면서 더 많은 햇살을 받기 위해 쑥쑥 자라는 경쟁을 한단다
배려하면서 경쟁하는 마음자리에도 버려야 하는 마음들도 숱하게 많았을 것이니…
오늘 아침 유난히 예뻐 보이는 산의 나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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