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지나치는 곳이기에 방심하던 길, 아니
에움길을 쓰윽 올라 굽이돌아 내려가는 길이기에 언제나 앞만 주시하던 길,
그럼에도 무언가 모를 정취를 안겨주는 곳이기에 좋아하는 에움길,
일요일 햇살 좋은 한낮
자질구레한 집안일들을 마치고 가을 햇살 가득히 내려앉은 에움길을 따라 걸었다.
걷는다는 느림의 행보에는 눈 해찰이 함께 한다.
문득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데
하늘아래, 폐가 지붕 위를 뒤덮듯 엉켜있는 노박덩굴을 보았다.
매년 내 블로그를 장식하는
폐가 지붕과 노박덩굴은 최고의 멋있는 만남이라는 생각을 한다
폐가는 쓸모없다고 여기었을 제 지붕을
삶의 터 삼아 살아가는 노박덩굴이 고마웠을 것이다
노박덩굴은 이리저리 마구 뻗치는 자신들의 삶의 형태 때문에
다른 나무를 타거나 길가에서 자랐다면 벌써 잘려 나갔을 것인데
지붕 위에서 안심하고 마음껏 햇살을 받으며
자유분방한 제 형태를 펼치고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둘의 만남은 정말 표현은 못하지만
두고두고 음미하고픈 사연을 만난 듯 서로 기쁜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저무는 가을 풍경과의 맛난 만남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이 아니 즐겁지 않은가
즐거움은
근엄한 가르침을 들려주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나는 삶의 길목에서
오늘을 지켜주는 느닷없이 만나는 소소함에 가득 고여 있음에
이를 문득 깨닫고 혼자 즐거워하노라니 마음이 한없이 맑아지고 있다.
이 가을을 온통 나 혼자 차지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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