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이상했던 태풍이 몰고 온 후텁지근했던 날씨가 물러나니
속절없이 찾아온 산책길의 서늘한 기운이
옷소매를 길게 내려주며 가을이라고 속삭인다.
나는 조금 더 여름옷을 입고 시원함을 마음껏 누리고 싶다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열심히 걸었다.
생각에 골몰하느라 내가 나를 잊으며 무의식적으로 걷는데
가로등 불빛 아래 한 무리의 억새들이 가만가만 제 머리를 날리고 있다.
어쩜 벌써 억새가 꽃을 피웠구나.
이제 막 피어난 듯
부드러움 보다는 어색함으로 불빛을 눈부셔하는 모습들에
이상스레 안도감이 느껴지며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래 가을이구나
햇살 아래서 흔들리는 억새의 풋풋함을 만나고 싶었다.
점심시간을 훔쳐 시내를 벗어났다.
아, 들판은 이제 초록에서 연두의 카펫으로 바꾸고 있었다
정말 가을이구나~~
이제 조금 더 지나면 황금빛으로 바꾸겠지
들판의 풋풋함과 억새의 풋풋함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가로등 아래의 억새꽃과
햇살아래의 억새꽃은 서로 가르마를 달리 빗었다.
서로 잘났다고 갈등하지 않고 다투지 않고
지나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흔들리면서
억새꽃은 더욱 고와질 것이다. 가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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