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렸을 적,
할머니 집의 어느 날 저녁 풍경이 생각납니다.
방 한가운데에 켜 놓은 호롱불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동네의 할머니들은 모두 똑 같이
한쪽 무릎을 세우고 삼을 삼고 계셨습니다.
긴 삼 가닥 한쪽 끝을 입에 물고
손으로 쭉 벗겨 낸 다음,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세워진 무릎에 놓고
손바닥으로 누르듯 밀면
그 삼 가닥들은 하나로 길게 연결되어 지면서
둥그런 바구니에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리며 앉혀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하여 해보고 싶어
간혹 울 할머니 옆자리에 끼어 앉아
따라 해 보기도 했지만
내 손에서 나오는 삼 가닥들은
그냥 스르르 풀려 버리면서
할머니의 손길을 기다리곤 하였지요.
오늘 만난 타래난초의 꼬여진 모습에서
삼 가닥들이 꼬이면서
이어지는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삼 가닥이 꼬이면서 실이 만들어지고
그 실로 삼베를 엮듯이
저 타래난초는 제 몸을 꼬아가며
나를 엮어가고 있었습니다.
- 오래 전 타래난초를 만나고 적은 글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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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파트 뒤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차머리를 돌리면
내가 즐겨 다니는 뒷산의 산등성 아래를 타고 도는 에움길이 있다.
나는 그 길을 참 좋아한다.
차들이 질주하는 도심의 번화가를 지나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나만의 길이다.
나무를 바라볼 수 있고 잔잔한 풀꽃들도 만나며
폐가의 지붕위에서 얽히고설키며 살아가는 노박덩굴도 만날 수 있다.
9월 초 어느 날,
곧 강력한 태풍이 올 거라는 뉴스들이 난무하던 날에 그길로 들어섰다.
문득 한 풍경을 자아내는 모습에 차를 멈췄다.
나무의 한 가지에 동그란 호박이 매달려 있는 것이다
어머나~ 조롱박도 아니고 표주박도 아닌
땅위나 담벼락위에 앉아 있어야 할
무게를 지닌 노란 호박이 어떻게 줄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
목을 뒤로 젖히고 한참을 바라보아도 해답이 없다
그냥 호박 줄기에 매달려 나무를 타고 있는 것이다.
강한 바람의 태풍이 지나간다는데 제대로 달려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폰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무심하게도 며칠을 잊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후, 그 길을 지나게 되었다. 반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 나무 곁을 지나며 하늘을 바라보니
아니!! 태풍 바람을 이겨내고 호박이 그대로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기특한 마음으로 또 사진을 찍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남편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호박이야기를 했다
남편이 툭 던지는 말 ‘이골이 났구만’
이골이 나다니 뭐가? 했더니
무거운데도 가볍게 매달려 살아가는 자세가 그렇다는 것이다.
아마도 남편은 저 호박이 표주박처럼 일상으로 매달려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했을까?
나는 문득 ‘이골이 나다’ 라는 말에 관심이 폭발한다.
‘이골 나다’ 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아주 길이 들어서 몸에 익숙하게 된 짓이나 버릇’ 이다.
다시 말해 무슨 일이든 반복해서 몸에 푹 밴 것을 ‘이골 나다’ 라고 하는데
이 말은 길쌈하는 과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수확한 삼이나 모시를 손질해
한 올 한 올 실로 삼기 위해서는 손톱으로 가른 후,
더 가늘게 하기 위해 한번 더 이로 째는데, 가늘고 고운 한 올을 완성하기 위해
입술과 치아를 사용하는 일을 계속 반복하게 되면
이(齒)에 골이 파인다고 하여 생긴 말인 것이다.
날마다 지나는 소소한 길과 장소에서 어느 날 문득 새롭게 보이는 모습을 만날 때가 있다.
날마다라는 친근함과 문득이라는 낯설음이 함께 공존하는 장소에서
그 어색함을 풀어주는 존재는 사물일 것이다.
지금 나는 호박이라는 사물에게서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의 유래를 생각하고 있으니
사물과 사람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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