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항몽충혼탑이 아니라 삼별초군항몽충혼탑이 맞지 않을까?
벽파항에서 약 2km를 가면 용장성이 있음을 알려준다
주차장에서 충혼탑을 지나 홍보관 우측으로 용장성의 터가 가지런하게 보인다.
후훅~ 깊은 한 숨을 쉬고 천천히 걸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문득 궁궐 수문장이 나와 나를 제지 할 것 같은 상상이 스쳐 지난다.
초여름을 맞아 무성하게 자란 잡풀과 들꽃들에서 뜻 모를 세월의 덧없음이 전해온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 왕을 지키기 위해
9달 만에 이 터를 잡고 궁궐을 짓고 성벽을 쌓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이다.
삼별초는 고려 말 최씨 무신정권 때
처음에는 밤에 도둑을 단속하기 위해 야별초(夜別抄)를 편성하였으나
차차 그 세력이 확대되니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었고,
거기에 몽골에 잡혔다가 도망 온 자들로서 편성된 신의군(神義軍)을 합해 조직된
사병집단이면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반관반사(半官半私)의 특수군대였다.
고려는 자주 침입하는 몽골과의 항전에서 처음에는 정부군의 활약이 두드려졌으나,
차츰 정부군보다도 삼별초의 항쟁이 활발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약해질대로 약해진 고려 왕권은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나
왕권을 무시하고 권력을 장악한 무신정권을 축출하려고
왕은 침입자인 몽고와 손을 잡고 개성으로 환도하였으니 가슴을 칠 일이다.
집안 싸움에 외세를 끌여 들였던 것이다.
이에 삼별초군은 배중손 장군을 지도자로,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진도까지 내려 와
용장사를 행궁 삼아 궁궐을 짓고 정통 고려국임을 주장하면서
성안에서 삶을 일구며 몽고군에 치열하게 항쟁 했지만 9개월 만에 진도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을까?
초록 풀 무성한 가운데 층층이 쌓인 돌 석축만이 남아
당시의 대궐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으니 참으로 무상한 세월이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석축마다에도 꽃은 피고 풀은 푸르고 푸르렀다.
푸르름 사이에 피어난 꽃 한 송이마다가
마치 이곳에서 스러져간 님들의 넋인 양 곱고도 고왔다.
고려정부임을 주장하며 진도에 내려와 용장성안의 용장사 대웅전을 중심으로 궁궐을 개축하였다.
왕으로 추대 되었던 왕 온은 왕무덤재에서 잡혀 죽임을 당하고
배중손 장군은 끝까지 항전을 벌이다가 남도석성에서 전사하였으니
이러한 삼별초의 항쟁은 비록 정부군에 반하는 행동이었지만
몽고에 나라를 빼앗길 수 없다는 정신으로 우리 민족 주체성 발휘에 있어서 높이 평가 되고 있다.
삼별초의 짧은 역사는 우리 민족을 지키려는 의지의 역사이며
침략해 오는 세력을 끝까지 싸워 물리치려한 행동의 역사인 것이다.
문득 학창시절에 배웠던
고려 말의 학자 길재의 시조가 떠오른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성을 지키려 성벽위에 올라 싸우는 삼별초군과
성 아래에서 말탄 몽고군들이 신식 무기로 덤벼들고 있었으니....
용장성을 뒤로하고 운림산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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