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寧越)이란 지명은 편안히 넘어가는 곳이라는데
이 지역이 어찌 수월한 곳이던가. 산 높고 골이 깊은 곳이 아니던가.
이런 지리적인 영향이 있어 유배지가 되었을까.
영월에 들어서려면 구름도 울음을 터뜨린다는 소나기재를 넘어야 한다.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어린 왕,
단종을 생각하면 그 어느 누구도 눈물을 머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단종은 이름에서부터 슬프다.
단종~~ 이는 짧게 마치는 운명인 것처럼 자꾸만 새겨지는 까닭이다.
나리소에서 영월까지는 40여분이면 되었는데
늦은 오후 햇살의 기울기는 나그네의 마음을 조금은 쓸쓸하게 해 준다.
영월역 부근 강변에 숙소를 정하고 저녁식사도 할 겸 시내를 잠깐 걸어보았다.
강원도 영월이라~~
산골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깔끔하고 아담한 도시였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기로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일찍이 영월에 와서는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와,
그의 묘가 있는 장릉만을 들렸기에
그곳은 배제하고 동강 따라 펼쳐지는 지형적인 신비함을 만나보기로 하였다.
우리는 이른 아침 김삿갓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장소는 아니었지만
왜 이곳이 김삿갓면 이라는 지명까지 지니게 되었는지 자못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내비는 유적지까지 약 30여 분이 소요된다고 알려 준다.
하지만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만 가득한 골골 깊은 곳을 찾아 들어가는 길을 달리노라니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달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김삿갓이 왜 삿갓을 쓰고 다녔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김삿갓의 유적지가 있는 곳은 김삿갓면으로
경북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지역 이었다.
김삿갓 유적지내 바로 옆에는 '곡동천'이 흐르고 있었다
문학관 근처의 감삿갓주거지의 마을이 어둔마을 이다.
어둔이라는 이름은 골짜기 해가 짧아 어둠이 일찍 내리면서 아두워지는 연유라 했다.
그만큼 이곳은 천하에 둘도 없는 피장처라 했거늘
삿갓의 유적지로 참으로 마땅한 곳이라는 생각이 머물자 마음이 쓸쓸해진다.
이른 시각이어서인지 문학관 문은 굳게 닫혀 있으니
주위를 돌아보았을 뿐인데도
이른 아침 이제 막 번지는 햇살 아래의 풍경은
그냥 뜻 모를 평온함을 안겨주는 신비로운 곳이었다.
김삿갓 주거지로 들어가는 길목은 차의 진입을 막았기에 잠시 걸었을 뿐
주거지의 세세한 면을 돌아보지 못했다.
방랑생활로 생을 마감한 삿갓의 묘소와 거주지가 이곳에 있는 까닭은
전국을 떠돌다가 전남 화순에서 돌아가셨는데
둘째 아들이 전국을 헤매며 아버지를 찾았고 자신의 거주지인 이곳 골짜기에 묻었다고 한다.
그 후, 향토사학자에 의해 발견되었고 이제는 유적지로 거듭나고 있으니
늦게나마 자식 곁에서 평안히 지내는 것 같은 생각에 내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영월역으로 향했고 다시 그곳에서 어라연을 찾아 나섰다.
어라연(魚羅淵)은 동강 상류에 속하며
동강의 많은 비경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강물 속에 뛰노는 물고기들의 비늘이 비단같이 빛난다하여
‘어라연’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니 아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라연을 찾아가기 위해 우리는 내비 도움을 받아 어찌어찌 삼옥 안내소까지 들어갔다.
우리가 차를 주차하자마자 여자 안내원이 급하게 마스크를 올리며 나온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던 안내원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곳에서는 어라연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이곳에서 편도 힌 시간,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잣봉(537m)이라는 산을 올라야 한 눈에 보이며
강변에서 바라보려면 정선까지 자동차로 1시간 이상을 가야한다고 하였다.
햇살은 따가운데 한 순간 실망이 겹쳐온다
버스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시던 한 아주머니께서
강한 사투리로 잣봉을 올라야 한다고 하면서
내 차림으로는 안 된단다. 등산복 차림이어야 한단다.
갈 수만 있다면 차안에 준비해온 차림이 있으니 얼마든지 갈수 있는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음 목저지 선돌을 행해 달렸다.
소나기재에서 서쪽으로 100m 지점에
약70m 높이의 기암으로 신선암(神仙岩)이라고도 한다.
쪼개진 절벽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세상을 구경하러
하늘에서 내려 온 신선이 노닐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1820년(순조 20) 문신 홍이간(洪履簡 1753~1827)이 영월부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문신이자 학자인 오희상(吳熙常 1763~1833)과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홍이간을 찾아와 구름에 싸인 선돌의 경관에 반해 시를 읊고,
암벽에 ‘운장벽(雲莊壁)’이라는 글씨를 새겨 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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