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일 오전 9시 10분에 진도대교를 건넜다.
정확히 7년 만이다.
7년 전, 13년도에 조도와 관매도에 가는 배를 타는 진도항(팽목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 날 관매도에 다녀오면서 역사와 예술을 품은 진도는
이제 진도대교가 있어 섬이 아닌 육지가 되어 쉽게 올 수 있으니
훗날 다시 오자며 약속을 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그 훗날이 7년의 시간을 뛰어 내 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그간 나라의 큰 슬픔이 있었던 곳이고, (2014년)
개인적으로는 나의 큰 아픔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2015년)
풍수설에 따르면 땅에도 음양의 기운 세기가 다르다고 하였다
양기(陽氣)가 센 땅에서는 학문이 승(勝)하고
음기(陰記)가 센 땅에서는 예(藝)가 승하다고 하니
혹자들은 그렇게 음기가 센 진도를
시 . 서. 화. 춤. 노래가 두루 갖춰진 예와 민속의 보물창고라 했으니…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목적지 중 하나인 운림산방이 진도에 있음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에 역사적 혼마저 서린 곳이기에 난 오늘 미미하게나마 그 흔적을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
명량대첩으로 왜군에 승리를 거둔, 충무공의 지혜가 담긴 울돌목을 바라보며
진도대교를 거쳐 진도로, 아니 예도(藝島)에 들어섰다.
맨 먼저 찾아간 곳은 진도대교 건너자마자 위용을 자랑하는 진도타워에 올랐다.
분명 관매도에 다녀올 때는 이곳이 없었는데…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승전을 기념하고자 2013년 10월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그래 내가 그 해 6월에 다녀왔으니 나로서는 처음일 수밖에 없었다.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으면 입장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입장 후 손 소독과 방문록을 기록해야했다.
혹시 모르는 일에 대비하는 마음일거라 생각하니
코로나에 대처하는 모두의 마음에 그냥 울컥해진다.
역시나 전망이 좋았다.
섬을 찾는 나의 개인적인 관심의 하나는
사방으로 트인 전망을 바라볼 때의 후련함이 좋기 때문이다.
손님이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도 우리 둘을 위한 영상을 보여준다,
이순장군의 명량대첩의 시물레이션이었다. 비록 가상이었지만
12척의 배로 130여 척이나 되는 왜군의 배들을 울돌목으로 유인해 함락시키는 장면이 통쾌하였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여기 울돌목으로 유인해서 함락 시켜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진도타워를 내려와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가 있는 벽파항으로 향했다.
타워에서 벽파항까지 가는 길은
군내도로로 말 그대로 해안을 끼고 도는 시골길이었다.
얼마나 한적하고 고요한지
여름 한 낮의 정적을 가르는 우리의 자동차 소리가 소음이 되고 있으니
조심스러움에 조수석에 앉은 내가 자꾸만 브레이크를 밟고 있다.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풍경을 바라보며
내비의 안내를 따라 달리다 보니 초라하지만 한적함으로 정돈된 한 항구에 닿았다.
항구를 바라보는 작은 언덕에 정자가 보인다.
오르는 길 초입에
必死卽生 必生卽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라는 말이 쓰인 표시목이 서있다.
이 말은 충무공이 명량해전을 하루 앞두고
극한의 공포 속에서 병사들에게 내린 결단의 말이었다.
후세의 우리들에게는 가벼운 명언처럼 내려오고 있지만
실제 그 당시의 장군의 마음을 헤아려보노라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정자를 가까이서 바라보니 벽파정 이라는 이름이 걸려 있다.
이 벽파정은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
1207년(고려희종3)에 세운 것으로 당시의 진도 관문이었다고 한다.
그 후 465년(조선 세조11)에 중건하였으나 허물어지고
옛 자취만 남아 있던 것을 2016년에 다듬어 세웠다고 한다.
이 정자는 내왕하는 관리와 사신들을 영송하고 위로했던 곳으로
정객과 문인들이 많은 싯구를 남긴 명소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 말에는 삼별초군이 들어온 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남은 12척 배를 이끌고 16일 동안 바닷목을 지길 때
향민들이 충무공을 도와 죽음으로 명량대첩을 이룬 곳이라 하니
지금의 이 고요함 속에 묻힌,
들리지 않는 함성소리에 주위 사물들이 확 깨인 듯싶으니
유독 짙은 푸르름이 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모습으로 마음에 들어온다.
1956년 11월 29일 건립된 이 전첩비는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불가사의하게 거둔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면서
진도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함께 기록하였으니 우리 민족 정신문화의 교육적 가치가 있다.
비문 전체 888자의 예서체로 글씨 형태가 전부 다르게 썼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 또한 인정받고 있다하니 과연 진도다운 비문이었다.
진첩비와 벽파정 사이에는 너른 바위가 있었다.
밀려오는 편안함에 덥석 바위에 앉아 항구를 바라보니
한 눈에 보이는 평화로운 풍경에 그냥 내 마음도 한 없이 평화로워진다.
이곳에는 지금 저 정자안의 남편과 바위에 주저앉은 나, 둘 밖에 없다.
아니 풍경까지 셋이 있을 뿐이니 마스크를 벗고 싶었다.
바위틈에 자라고 있는 노란 바위채송화가 내 얼굴을 보더니 방긋 웃는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개망초의 그리운 마음이 와락 안겨온다.
분명 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는 작은 풀 하나에도
그 옛날의 흥망성쇠의 애환을 모두 안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드니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800여 년 전, 어느 날
몽고병정들이 고려의 힘없는 병사들과 비굴한 벼슬아치들을 앞세워
삼별초군을 몰살시키기 위해 쳐들어 온 무서움을 기억하고 있을까.
오늘처럼 고요하고 호젓한 이 항구 마을에서 삼별초의 배중손 장군이
몽고의 침략자들을 막으려고 끝까지 저항하다 끝내
기진맥진 쓰러진 곳이 이곳 벽파항이 아니던가.
간신히 피신한 배중손을 찾으려 용장성을 피밭으로 만들더니
기어이 장군의 목숨을 빼앗아 버렸으니!!
넓게 펼쳐진 바위에 쏟아지는 햇살마저 기세가 꺾인 듯 한결 부드럽다.
그래, 나도 이제 그 시절의 대궐 터였던 용장성으로 가 봐야겠다.
'마음따라 발길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藝의 고장 진도(운림산방) (0) | 2020.06.24 |
---|---|
藝의 고장 진도(용장성) (0) | 2020.06.23 |
동강따라 영월여행(한반도지형, 돌개구멍, 요선정) (0) | 2020.06.10 |
동강 따라 영월여행 (김삿갓유적지, 어라연, 선돌) (0) | 2020.06.09 |
동강을 따라 (0) | 2020.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