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마음따라 발길따라

사유의 길에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치를 배우다

물소리~~^ 2020. 3. 26. 13:41







지난 토요일 오후,

오늘 드라이브 스루 할까? 라는 느닷없는 남편 말에 내 입에서 즉각 튀어나온 말은 왜요!”였다. 놀라는 내 모습에 남편은 약간 당황한 듯싶더니 아니 넘 답답하니 드라이브 하고 오자는 말이었다고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더니 내가 딱 그렇다.


요즈음 일상이 그렇다. 집에만 있자니 답답하고 그렇다고 어디 함부로 나 다닐 수도 없는 마음을 안고 지내야 하는 시간들인 것이다. 그럴까? 자동차만 타고 다니다 오면 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미적거리다가 어디 가느냐고 했더니 나더러 정하라고 한다. 제일 어려운 미션이다. 강진의 백련사에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곳의 동백 숲이 그렇게 유명하다 했는데 여태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다른 속마음이 있었으니 백련사에서 정약용이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귀양 와서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하고 차를 끊여 마시던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이르는 길을 걷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다신초당에는 두 번 다녀왔지만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길은 걸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오후 1시를 훌쩍 넘은 시간에 출발했다. 중간에 휴게소에도 들리지 않고 그냥 달렸다. 봄기운이 완연하게 퍼져있는 들녘의 한적함이 참 좋다. 고속도로조차 여유로우니 평소라면 기분 좋았을 텐데 오늘만큼은 썩 반갑지 않은 풍경이다.








백련사에 도착하니 그래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거닐고 있었는데 나도 물론이지만 모두가 마스크를 하고 있으니 백련사 부처님께 조금 무례한 것처럼 보인다. 동백 숲은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이 감돌 지경이었는데 꽃은 별반 보이지 않았다. 벌써 꽃이 진 것일까? 아니면 아직 다 피지 않은 것일까? 일주문을 들어서서 발맘발맘 걸으며 해탈문을 지나자 다산초당 가는 길의 안내판이 보인다. 백련사 내부구경은 남편 혼자 하라하고 나는 다음 기회로 남겨 놓고 초당 가는 길로 내처 올랐다. 초당까지의 거리는 0.9km, 남겨진 오후 시간 내에는 충분히 다녀올 것 같았다.





길가의 동백나무들이 오후 햇살에 마음껏 자태를 들어내고 양지 바른쪽에는 한 두 명이 앉아 쑥을 캐고 있었다. , 진정 봄이구나! 나무뿌리들이 뒤엉킨 길이라고 상상했는데 뿌리들을 흙으로 덮고 재정비 했는지 계단길이 계속 이어진다.


그 옛날 다산은 이 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배동안 사람이 그리워 백련사의 혜장 스님을 만나러 간다는 것은 어쩌면 핑계였을지도 모르겠다. 형은 흑산도로, 자신은 이곳 강진에, 동생은 죽임을 당해 집안이 풍지박살이 된 터에 얼마나 마음의 응어리가 깊었을까. 그 응어리를 풀며 달래며 이 길을 오갔을 다산을 생각하노라니 다소곳한 이 길이 한없이 무거우면서도 정겹게 느껴진다.


하지만 다산은 200년이 흐른 후의 내가 생각해도 진정 대인이었다. 다산은 자신 처한 환경을 원망만은 하지 않았다. 위기를 기회삼아 더욱 정진하며 과골삼천이 되도록 연구하며 집필하여 우리에게 목민심서를 비롯해 600여 권의 책 보물들을 남겨 주었으니 참으로 이 길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 차밭

다산과 혜장스님은 이 차나무들의 잎을 따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었을까


▲ 남산제비꽃



▲ 낚시제비꽃


▲ 편백나무의 혹

다산의 마음 속에 응어리진 한을 대신 받아 준 것 같은 생각이......



봄이면 지금처럼 동백꽃이 만발했을까. 바스락거리는 산죽들의 소리에 여름날의 더위도 잊으며 걸었을까. 모든 나무들이 잎을 떨어트려준 푹신한 가을 길을 걸으며 가족과 고향 생각을 했을까. 하얀 눈 덮인 겨울날에는 깨끗한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원했을까

 



동백꽃을 만나고 싶어 찾아온 이 길에서 그보다 더 좋은 다산선생의 마음 꽃을 만났나 보다.

당시 백련사 주지 스님이었던 혜장은 해남 대흥사 출신의 뛰어난 학승으로 다산보다 10년이 어렸다. 유학에도 식견이 높았던 그는 다산의 심오한 학문경지에 감탄하여 배움을 청했고, 다산 역시 혜장의 학식에 놀라 그를 선비로 대접하였다. 두 사람은 수시로 서로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기기도 했다. 혜장이 비 내리는 깊은 밤에 기약도 없이 다산을 찾아오곤 해서 다산은 밤 깊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고 한다.


다산과 혜장이 서로를 찾아 오가던 이 오솔길은 지금도 동백 숲과 야생차의 싱그러움이 가득하니 아름답다. 긴 유배생활동안 다산은 얼마나 사람들이 그리웠을까. 그런 그에게 다가온 혜장 스님은 다산에게 그리움을 풀어주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 다산동암




▲ 보정산방 :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방

추사 김정희 집자(集字)



문득 나타난 다산 동암을 지나자 다산 초당이 나를 반긴다. 한두 명씩 찾아온 사람들이 초당의 마루에 앉아 다산의 영정 또는 풍경을 바라보는데 모두가 입을 하얗게 막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에 왔으니 다산의 흔적을 한 번 돌아보고 지나야 한다.





▲ 1.연지석가산

초당 한 옆으로 다산이 손수 작은 연못을 만들고 가운데에 돌로 산처럼 쌓아놓고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라 하여 초당의 왼쪽 문에 앉아 이 연못을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 2. 약천

수맥을 찾아 음용했던 작은 샘을 약천(藥泉)이라고 불렀다.




▲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

그림출처 / 인터넷 검색

그림의 오른쪽 가옥이 다산 동암, 왼쪽 가옥이 다산초당





▲ 다산초당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집자

다산동암의 글씨는 다산의 집자라고......


▲ 3. 정석

유배가 끝나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기 전

다산은 뒷 마당의 바위에 정석(丁石)이란 글자를 새긴다.


▲ 4. 다조

마당에 놓인 넓은 반석을 다조(茶竈) 라 부르며 그곳에서 차를 끓이곤 했단다.

이 네곳을 다산초당4경이라고 하니 이 4경만큼은 다산의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 있을 것이다



▲ 천일각

흑산도로 귀양 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심회를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다산 동암 곁에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정자가 없었지만 다산은 훤히 보이는 강진만을 바라보며 늘 이곳에 앉아서 형을 그리워했다는 기록이 있어 후세에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저 앞으로 펼쳐있는 바다 끝 흑산도에 있는 형(정약전)을 얼마나 애타게 불렀을까.





나는 곧장 귤동마을을 지나 주차장으로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왔던 길을 되돌아 걸으면서 다시  백련사로 향했다. 다시 한 번 다산의 사유의 길을 걷고 싶었던 것이다. 다산은 이 길을 걸으며 온갖 생각으로 자신의 학문을 집대성 했을 것이니 미미한 내 마음으로 음미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 개구리발톱



▲ 세잎양지꽃



▲ 꽁꽁 묶임 몸으로도 꽃을 피웠으니

이 길을 걸었던 다산의 업적이 이러할까



▲ 이 나무도 꼬인 아픔으로 강진만을 바라보고 있네~~


, 그렇구나. 그 당시도 전염병이 돌았었고 그에 대처하는 목민관들의 지침도 어김없이 마련하지 않았던가. 그 길을 나는 지금 마스크를 끼고 걷고 있나니 하늘에서 다산은 어떤 생각을 하며 바라보고 계실까


관에서는 약을 공급하는 일부터 하라고 했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의 숫자를 파악하고 명부를 작성해야 하며, 사망자가 나오면 빠짐없이 그 숫자를 파악해두어야 한다고 했다. 온 집안이 몰사하여 시체를 처리할 사람이 없을 경우는 관에서 직접 처리할 방법을 강구해 주고, 그 마을의 유족한 집안에서 돈을 주고 인부를 사서라도 유감없이 처리하기를 권장하라고 했다.


그런 위급한 때에는 목민관이 직접 현장에 나가 순행하면서 물색(物色)을 살피고 어진 정사를 힘써 행하면 그 애감(哀感)과 열복(悅服)이 어떠하겠느냐면서, 하루의 수고가 만세의 영광이 될 터이니 그런 일을 달갑게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우매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했으니 지금 우리들이 전염병에 대처해야하는 자세와 똑같은 지침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만세의 영광을 누리며 모범이 되고 있는 것이다.



▲ 뿌리길


혜장과 다산은 서로를 신뢰하고 믿음이 있어 늘 그리워하면서도 여기 이길 900m의 길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인연을 이어왔으니 나는 문득 이 길이 두 사람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해 주었다고 믿고 싶었다. 그야말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의 긴장감이 오랜 세월 권태로움 없이 서로 마주할 수 있는 힘이 된 것 아닐까.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인 셈이다. 요즈음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향하고 있는 바, 우리 선조들이 일찍이 이룩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이치를 대입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백련사에 도착하니 어느새 햇살은 깊은 기울기로 동백나무 사이를 비집고 길게 들어와 있다.

단순하고 소박한 길의 만남이었지만 역사를 만났다는  뜻 모를 충만함이 가득 차오른다.



백련사를 벗어나 가까이 있는 영랑 생가와 무위사도 시간상 설렁설렁 스루스루(through) 하였으니 이곳 강진은 나를 또 다시 초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유배 처음시기를 보낸 다산 선생의 사의재도 영랑 생가 가까이 있음은 물론 백련사 경내를, 또 보물이 많은 무위사도 다시 만나야 할 것이니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의 유홍준님이 남도 여행 1번지로 이곳 강진을 꼽은 그 이유를 이제 알 것만 같다. 훗날 마스크를 하지 않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찾아 와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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