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비 그친 후
잔뜩 흐린 날씨가 마치 꼭 내 머리를 짓누르는 두통처럼 우중충하다
뒷산이라도 오르면 그나마 나아질 것 같아 차림을 하고 나섰다.
산은 온통 초록으로 물들어가며 치장하느라 바쁜 듯싶으나
사람들의 자취는 보이지 않으니 내 혼자의 발자국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산에는 팥배나무, 덜꿩나무, 노린재나무, 아까시나무 등이
하얀 꽃을 피우며 어둑한 숲을 밝혀주고 있었다.
발맘발맘 걷노라니 휘익~ 하는 나지막하고 조심스러운 긴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아, 호랑지빠귀 새이다.
호랑지빠귀 새가 울면 봄이 왔다는 신호라는데 왜 이리 늦게 찾아 와 울고 있을까.
아마도 호랑지빠귀도 그동안 자가 격리 하고 있었나 보다
행여 새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눈을 들어 두리번거렸지만
찾을 수 없어 포기하는데 갑자기 푸드득 날아올라 더 깊은 숲으로 날아가 버린다.
호랑지빠귀야 건강히 지내다가
내년 봄에는 일찍 찾아와 우리의 찬란한 봄을 잃지 않도록 해 주려무나.
오솔길은 초록빛 나무들이 만들어 준 터널을 따라 이어지고 있으니
마치 내가 오월 나무들의 사열을 받는 듯싶다.
아, 이렇게 나를 환영해 준 무엇들도 있었구나.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깊은 숨을 쉬노라니
진한 향기 한움큼이 쓰윽 내 코를 타고 들어온다.
아! 그 옛날 어머니의 분 곽에서 맡았던 분향이다.
어쩜 나는 오동나무 아래에 서 있었구나.
길 위에는 연보랏빛 꽃들이 떨어져 있었다.
고개를 바짝 쳐들고 바라보아야하는 높은 나무에 달린 꽃들이
안쓰러운 마음으로 땅위의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 위의 꽃들은 아래를 향해 꽃송이를 벌리고 있고
땅위의 꽃들은 누운 채 하늘을 향해 꽃잎을 벌리고 있으니
어쩌면 두 꽃들은 서로 진한 향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나보다
하니 그 꽃 향이 울 어머니의 분향이 되어 나에게 까지 전해 온 것이다.
오솔길 위의 꽃들을 차마 밟을 수 없어 가만히 서 있는데
톡! 꽃 한 송이가 길가 풀 위로 떨어졌다.
풀은 온 몸으로 꽃송이를 받아내며 휘청거리더니 금세 꼿꼿하게 제 몸을 세운다.
한 순간 저 풀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순간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
하지만 풀은 금세 제 몸을 세우며 떨어진 오동꽃을 제 꽃 인양 보듬어 주니
절망을 가득 안고 떨어진 오동꽃은 금방 풀의 꽃이 되어 환하게 웃고 있다.
비에 젖은 풀내음과 꽃향이 어우러지니 이 오솔길이 더욱 향기롭다.
싱그러운 오월의 산이 내 머리의 무거움을 그렇게 보듬어 주었을까
머리가 조금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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