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대책 없이 내린다.
멀쩡한 하늘이었다가도 금세 먹구름을 드리우는가 싶으면
곧바로 굵은 작대기 빗줄기를 내리는 것이다.
산책시간에도 그랬다.
저녁 식사 후, 날씨를 가늠하려 베란다 창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니
말끔히 개어 있으니 기분 좋게 출발을 했다.
대책 없는 비가 조금 염려되었지만
산책시간은 1시간 정도의 길지 않은 시간이니 거추장스러운 우산을 굳이 챙기지 않았다.
시작점에서 늘 왼쪽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오른쪽으로 돌면 물빛 광장을 만나고, 광장 주변으로 음식점들이 다수 있으니
그 번잡함을 피하는 나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오늘은 그냥 오른쪽 방향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비 그친 거리는 깨끗했고
장맛비 때문인지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걷고 있는데 아니? 광장 조금 못 미쳐 빗방울이 떨어진다.
어쩌지? 그냥 되돌아가기는 싫다.
금세 그칠 것 같은 약한 빗줄기는 내 판단을 기웃거리듯 질금거렸다.
이 정도면 걸어도 괜찮을 것 같아 내처 걷는데 점점 굵어지기 시작하는 빗줄기가 아닌가.
되돌아가도 비에 젖는 것은 마찬가지 일 것이라 여기고
음식점들 사이에 있는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우산 있느냐고 물으니 있단다.
휴! 얼마나 안도가 되는지… 거금 육천을 주고 우산을 샀다.
차 트렁크에도, 집안에도 우산이 많이 있는데 지금 순간은 아무 쓸모가 없지 않은가.
걱정을 싹 씻어내고 우산을 받쳐 들고 기분 좋게 걷는데
빗줄기가 얼마가 강한지 금세 내 운동화와 바지자락이 푹 젖어 버렸다.
그런데도 우산이 있다는 든든함은 나를 계속 앞으로 걷게 하는 것이다.
산책길에는 우산이 없어 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냥 옷이 다 젖도록 느긋하게 걷는 사람도 있고
우산 하나로 둘이 받고 걷는 사람들에게는 우산이 있으나 마나 했지만도
둘이 함께 받는 오붓함으로 조급해하지 않는 걸음을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쪽 방향에서도 호수의 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연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번식을 하고 있으니 조만간 이 호수가 연으로 뒤덮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급하게 쏟아지는 사나운 빗줄기를 받아내는
연잎들의 와사사삭사사삭 하는 아우성이
내 우산위로 떨어지는 우두두둑 하는 빗줄기 소리를 능가한다.
갑자기 쳐 들어오는 적군들을
일제히 한 방향으로 서서 온 몸으로 방어하는 듯싶기도 하고
연약한 큰 꽃송이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니
절대 힘 잃지 말라고 큰 소리로 응원을 보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아, 얼마나 처절한 몸짓들인지… 저들의 모습에서 처연함이 전해 온다.
1시간 쯤 지났을까 어느새 또 빗줄기가 약해지더니 금방 그치고 말았다.
호수의 수면은 어느새 산책로 가까이 까지 올라와 있을 만큼 정말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호수 끝부분에서
커다란 물방울을 담고 있는 연잎들을 보았다.
우산을 받쳐 들고도 내 옷들은 사정없이 젖었는데
우산도 없는 저 연잎들은 억수 같은 비에도 조금도 젖지 않고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커다란 물방울을 끌어안고 있었다.
문득 '연잎의 지혜'가 생각이 났다.
어느 때의 연잎들이라면 자기 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또르르르 굴리며 중심으로 모아들여 아주 예쁜 구슬로 만들어
어느 순간, 그만 줄기와 잎을 살짝 구부리면서 안에 있던
수정 같은 큰 방울의 물을 '쪼르륵~~' 쏟아버리고는
다시 꼿꼿하니 잎을 세워 빗물을 받기 시작하곤 했을 것이다.
넘치기 전에 비워내며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고
또 다른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연잎의 모습을
우리 선인들은 연잎의 지혜라 하며 가르침을 주셨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자신을 지탱해 준 줄기도 물에 잠기고,
연잎 자체도 물 위에 떠 있으니
받은 빗물들을 쏟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들에 무엇을 견줄 수 있을까
아무리 좋은 뜻인들 주변과 배경이 받쳐주지 못하면 이룰 수 없다는 것일까.
그럼에도 연잎들은 젖지 않았으니 근본만은 잊지 않은 듯싶다고 위안을 할까
비, 우산, 사람, 연잎들은 빗속의 사물이 되어 제 삶의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할까.
문득 오늘 산책 방향을 달리 잡고
비가 내려도 되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걸으며
뜻밖의 연잎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동시에 일어난 우연일 뿐인데도
빗 속의 사물들은 서로 오케스트라의 연주자가 되어
완벽한 화음을 이루고 있다고 바라본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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