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한쪽에 무리지어 자라는 연들이 차츰 제 몸을 키우더니 이젠 제법 연못을 이루며 제 영역으로 차지하고 있다. 넓은 연잎을 출렁이며, 꽃을 피우며, 지나는 이들에게 뜻 모를 마음을 지펴주며 蓮들이 자라고 있었다.
넓은 잎의 출렁거림도, 하얀 꽃잎을 소담스럽게 올리며 피는 꽃도 좋지만 겨울철의 연줄기들이 그려내는 겨울풍경도 퍽 관심을 끌어가고 있다. 지난 여름날, 수백 개의 개체가 한 무리를 이루며 있을 때는 괜한 풍요로움과 경이로움이었는데 겨울 차가운 물에 제 몸을 투영하며 서 있는 연줄기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측은지심을 유발케 하고 있으니…
가늘고 긴 연약한 연줄기에는 말라비틀어진 연잎이 달려있는가 하면 간혹 무거운 연밥집이 고개를 푹 꺾은 채 매달려 있기도 한다. 물속에 외다리로 서 있으면서 바람도 눈비도 견디며 애쓰는 연줄기의 모습은 그냥 그대로 외로움의 덩어리처럼 느껴지니 더 눈이 자주 가고 있는 것이다.
내리지도 않았던 겨울눈이 물러갔으리라고 단정하며 지내던 날, 느닷없이 내리는 눈발을 가르며 천천히 연못 곁을 지나다 기어이 차를 세우고 말았다. 미끄러운 길을 운전하느라 모두모두 느림보 운행을 하는 도로 한쪽에 비상등을 켜두고 연못 가까이 내려섰다. 바람이 매서워서인지, 이른 아침시간이어서인지, 호숫가 따라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산책로와 연못의 경계인 경사진 둑에 쪼그리고 앉았다. 가까운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서였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세상에 어느 화가인들, 어느 붓인들, 어느 물감인들 이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까. 지나는 바람소리마저 안으로 삼켰다 뿜어내는 사각거림의 소리를 그 무엇의 음향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는 나는 점점 추워지고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는 가녀린 연줄기들의 당당함에 한 생각이 섬광처럼 지나간다.
아. 저들은 지금 제 몸으로 지난 여름날의 꽃에게 연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오직 자기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자로 물위에 글씨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당당한 모습이었나 보다. 외다리로 서있는 가녀린 모든 연줄기들은 제 각각의 언어로 연서를 쓰는 훈훈한 분홍빛 마음으로 이 겨울을 이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재밌는 것은 연줄기가 ∧ 자를 쓰면 물은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를 쓰니 내 눈에는 마름모꼴이 되어 보이고 있었다. 연줄기와 물속 깊은 곳의 뿌리에 감추어진 꽃은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형체를 이루고 있었다.
지지난해이던가? 그 해 겨울날의 연줄기를 보며 나는 연들이 수학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눈 오는 날에 만난 연줄기는 기하학적 무늬로 연서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때론 그곳에 연이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기도 하는 나에게 연은 나로 하여금 특별한 의미를 새롭게 이어주고 있으니 어쩌면 연들은 나에게 늘 말을 걸어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문득 연줄기들의 연서를 읽으며 나 혼자 즐거워하고 있으니 어디 연 뿐일까. 내 주위의 사물들은 그렇게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읽을 수 없는 글자들로 말을 걸어오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들이 보내주는 연서를 읽지 못하는 청맹과니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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