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붕위의 노박덩굴 열매
출근길 에움길을 돌아올라 가볍게 내려가려는 찰나의 지점에 폐가 한 채가 있다. 아니 빈집이라고 하고 싶다. 그 빈 집 지붕위에는 지금 한창인 노박덩굴의 열매들이 거칠 것 없이 뒹굴고 있는 모습이 언뜻 보인다. 매일 이 모습을 바라보며 어느 하루 사진을 찍고 싶어 차에서 내려 주변을 맴돌기도 했지만 땅 위에서 바라보는 내 눈에는 지붕위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일요일 오후,
일부러 지붕위의 모습이 보일까 싶어 가까운 산등성으로 올라가니, 과연 빈집 지붕위에서 노박덩굴은 서로 뒤엉킨 채 햇살을 즐기며 놀고 있는 것이다. 저러다 밤이 되면 낮 동안 받아둔 햇살을 추운 달에게 나누어 주며 친구가 되어주고 있을까. 제 몸의 껍질을 툭툭 벗겨내며 고운 빛 열매를 자랑이라도 하는 것일까. 엉킨 몸으로 어떻게 저 지붕위로 올라 갈 수 있었을까. 엉켜있지만 질서 있게 지붕위로 오르는 아리아드네의 실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문득 신화 한 꼭지가 생각난다.
그리스 남쪽 섬나라 크레타에 다이달로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손재주도 좋았거니와 무엇이든 만들기를 퍽 좋아했다. 이 나라의 왕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에게 한 번 들어가면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 하나를 만들 것을 명했다.
왕이 미궁을 만들려고 한 까닭은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위해서였다. 미노타우로스는 머리는 소, 목 아래로는 사람으로 사람고기를 먹어야하는 골칫거리 괴물이었다. 왕은 이 괴물을 죽일 수 없다. 자신과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이달로스가 미궁을 완성하자 왕은 이 괴물을 미궁에 가두어버렸다. 그런 후 왕은 주변 약소국인 아테나 왕을 협박하여 매년 12명의 선남선녀를 바치게 했다. 미궁의 괴물에게 먹이로 넣어주기 위해서였다.
아테나의 왕자 테세우스는 자기 나라의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어느 해 왕자는 괴물을 죽여 버릴 생각으로 제물이 될 12명에 끼여 크레타로 갔다. 그런데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하니 테세우스를 미궁으로 넣어 죽게 할 수 없었다.
공주는 아테나의 왕자가 미궁으로 들어가는 날 찾아가 몰래 실타래를 건네주었다. 왕자는 문설주에 실을 묶어두고 실을 풀면서 한나절을 걸어 들어가 괴물을 만나게 된다. 테세우스는 괴물을 때려죽이고 젊은이들을 데리고 실을 찾아 걸으면서 무사히 미궁을 빠져 나오게 되었다.
오늘날, 아리아드네 공주가 테세우스 왕자에게 건넨 실타래를 ‘아리아드네의 실’이라 하여 어떠한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유력한 암시를 뜻하는 말로 곧잘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에게 신화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옛 이야기들은 단순한 이야기라고만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복잡성을 내포한 상징성이 있다. 은근한 상징성을 내세워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빈 집 지붕위의 엉킨 노박덩굴의 자태에서 문득 신화를 떠올리며 이야기에 빠져든 내 마음 안에도 실타래 하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실타래를 찾지 못하고 있을 뿐.…
▲ 뒤엉킨 채 지붕 위를 잘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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