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마음따라 발길따라

화암사에서 200년 전의 학자를 만나다.

물소리~~^ 2019. 4. 23. 15:40





▲ 병풍바위에서 바라본 화암사


화암사를 찾아가는 길,

내비는 몇 번을 우회전시키더니 한 농로로 진입케 한다. 조심스레 농로를 따라가다 농로가 끝날 무렵 다시 우회전하란다. 아니? 아주 좁은 산길로 이어진다.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정도의 길이다. 요즈음 시대의 사찰 입구도로로는 어울리지 않는 길이다. 길섶의 나뭇가지들이 자꾸 차를 스치며 길을 비켜준다. 구불구불 한참을 달리니 화암사 지붕이 보인다. 길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는 한 책의 제목을 떠올리며 아! 여기로구나! 하는 순간 차는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만다.


흙길이 깊게 파인 곳이었다. 할 수 없이 천천히 후진을 하다 조금 안전한 곳에 차를 주차하고 내려 걸었다. 비록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길이지만 전해오는 기운은 더 없이 좋다. 나무들은 이제 막 꽃 진 자리에 손톱만한 새잎을 새살거리며 내밀기 시작하고 있다. 정오를 비켜간 햇살을 받으며 고운 그림자를 내린 나무들의 침묵을 깨고 새소리가 들려온다.


나를 먼저 맞이한 것은 보호수로 지정된 고목, 느티나무였다. 멀리서 웬 바위가 있을까? 했는데 그 바위는 바위가 아니라 고목의 텅 빈 내부를 채우고 있던 시멘트덩어리였던 것이다. 두 그루 고목의 보호를 받고 있는 듯싶은 허름한 건물 앞에 커다란 차가 주차되어 있다. 저 차는 어떻게 올라왔을까? 하며 두리번거리는데 아니,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가 내가 올라온 길과 다르게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피식 웃음이 나온다. 차량에 장착된 내비는 오솔길을 좋아하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그렇게 굽은 산길로 안내를 했나보다.


오석산 아랫자락에 위치한 화암사는 추사의 일가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절이다. 이 사찰을 중건한 김한신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이다. 그의 아버지 김흥경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절을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더욱이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로서, 영조 임금의 둘째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로 봉해졌는데, 화암사 주변 토지를 별사전(別賜田)으로 하사 받아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화암사에 머물며 공부한 적이 있으며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에도 문중에 서한을 보내어 화암사 중건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 건물이 현재의 화암사이다.




▲ 보호수 느티나무



▲ 화암사 입구 요사체

추사의 필체가 걸려 잇다.


▲ 추수루(추사의 글씨)


▲ 원통보전(추사의글씨)



▲ 요사체 뒤편에 중건된 화암사



▲ 화암사를 돌아 걸으면 병풍바위를 만난다.



▲ 커다란 두 무리의 병풍바위 ▼



병풍바위 1


▲ 천축고생댁(부처님의 나라라는 뜻)

청나라 옹방강 집의 대련에 써있던 '천축고생댁' 이라는 글자를 보고

고국에 돌아와 이곳 병풍바위에 행서체로 새긴 것이다.



병풍바위 2



▲ 시경(시의 경지)

추사는 스승 옹방강에게서 받은 육방 옹의 글씨 '시경' 탁본을 받고

고국에 돌아와 이곳 바위에 자신의 예서체로 새겼다



▲ 병풍바위와 화암사




병풍바위 위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약300m 걸으면 쉰질바위가 나타나고

그 바위에 새겨진 소봉래라는 글씨를 볼 수 있다.

소봉래 글씨 밑에 추사제라는 글씨 까지 새겨져 있으니

추사의 글씨임이 더욱 확실한데

이유는 화암사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글씨를 새기면서

추사 자신의 글씨임을 확실히 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 소봉래 - 추사제




이제 굽은 산길을 내려가야 한다. 쉽고 곧은길이 있었지만 나는 다시 거친 길을 가야한다. 이곳에 와서 추사의 글씨들을 보았다고 하여 위대한 학자의 모든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선택한 오솔길을 걸어 내려가며 오늘을 음미해 보아야겠다. 이런 내 마음을 반겨 주는 듯, 한 무덤가에 피어난 탐스런 조개나물 꽃에 또 금방 내 마음이 내 달리고 말았으니 이런 내 모습을 추사는 꾸짖지나 않을런지.... 그럼에도 내 마음은 뿌듯하다.



▲ 자주개자리








▲ 조개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