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스쳐 지나간 모든 것들을 소중함으로 새겨두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맥없이 긴장감이 풀린다. 지난 6일은 올 해 마지막 진료일 이었다. 그에 앞서 11월 29일에 촬영한 ct사진 결과를 듣는 날이기도 하였다. 결과를 기다리는 내내 내심 참 많이 긴장한 듯싶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견과 함께 내년부터는 4개월마다의 진료를 잡아주시니 그냥 그렇게 긴장이 풀리면서 허탈함이 밀려왔다.
늘 하던 저녁 산책도 싫고 느닷없이 한 밤중에 믹스커피가 마시고 싶은 마음은 그 무엇에 대한 반항심인지 모르겠다. 딱 하루만 마음 내키는 대로 하자고 했다. 앞으로 더 많은 날들을 긴장하며 지내야 하거늘… 한 순간의 흐트러짐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후회하는 청맹과니가 되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마음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무어라도 계획을 세워놓고 해 나가면 마음이 추슬러질까. 무언가라도 붙잡고 싶었다. 잠이 오지 않는 시간 뒤척이며 생각하노라니 문득 바다백리길이 생각이 난 것이다. 언제부터 실천하자고 계획한 일~ 바다백리길을 찾아 나서야겠다.
1코스 미륵도 달아길 10km, 2코스 한산도 역사길 12km, 3코스 비진도 산호길 4.8km , 4코스 연대도 지겟길 2.3km, 5코스 매물도 해품길 5.2km, 6코스 소매물도 등대길 3.1km, 총 37.4km로 백리에 근접하는 5개의 섬 마을을 따라 걷는 길이기에 바다백리길이라는 명칭 하에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명품길이다.
남편에게 매물도에 다녀오자 청하니 얼른 대답한다. 바다백리길 중 6코스인 소매물도에는 3년 전에 다녀왔으니 5코스인 매물도를 다녀오자 한 것이다. 당일 코스이니 첫 배를 타기 위해 새벽 4시 30분에 출발하여 거제 저구항에서 8시 30분 첫 배를 탔다. 날씨가 쌀쌀하다. 배는 제 시간에 출발~ 많은 사람들이 탔지만 대부분 소매물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었고 대매물도에는 20명 정도나 될까? 등대섬으로 유명해진 소매물도의 명성에 가려진 형님뻘 매물도의 쓸쓸한 풍경이었다.
▲ 거제 저구항
▲ 매물도행 배 선실에서 찍은 바다 풍경
▲ 매물도 당금마을 선착장
매물도의 당금마을에 도착하니 바람이 섬의 주인인 냥 낯선 손님들을 맞이하니 어설프기만 하다. 겨울날의 섬은 쓸쓸하였다. 가족들과 함께 온 아이들 소리가 섬의 정적을 깨운다. 선착장 저쯤에 배가 부른 여인이 앉아 있다. 무심코 민망하다 싶었는데 海를 품은 여인이란다. 아, 어머니 품속 같은 ‘해품길’ 이로구나. 어느새 낯선 마음이 스러지며 섬에 대한 호기심이 일렁인다. 바다 백리 길을 알리는 파란 선을 따라 마을 깊숙이 따라 들어가노라니 돌담위에 덩그마니 달린 노란 하늘수박들이 이채롭다.
육지마을들의 텃밭 정도 되는 밭에는 방풍나물이 자라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첫 번째로 만나는 발전소에 이르는 잠깐 동안의 길을 걷는 동안 추위는 어느새 달아났다. 섬은 그렇게 속 깊은 정으로 소리 없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옷차림을 조금 가볍게 하고 오길 잘했다며 이제 주어진 길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 것이라 생각하니 그냥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오늘 하루 지도상에 표시된 곳곳의 명소를 다 올라보고 바라보면서 섬의 모든 것을 마음에 새기고 싶다.
▲ '해품녀' 조형물
▲ 하늘수박이 달려있는 마을 돌담
▲ 파란선을 따라 걷는 바다백리길
▲ 꽃 진 털머위
▲ 매물도 발전소
▲ 발전소 전망대에서
이 길의 끝은 바다일까?
▲ 당금마을과 방풍나물 밭
▲ 몽돌해변
▲ 폐교된 한산초교 분교
발전소 전망대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뒤 돌아서니 폐교된 초등학교가 나온다. 학교를 만나면 내 마음은 아련해 진다. 늘 학교 어느 곳에서 뒷짐을 지고 다니시던 아버님이 생각나고, 학교 옆 관사에서 살면서 학교 운동장을 놀이터 삼아 놀던 내 유년시절의 그리움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이기에 내 마음은 거칠 것 없이 추억을 향해 내 달리곤 한다.
이곳 매물도의 폐교 운동장은 캠핑장소로 유명하다는데 겨울철이어서인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학교 앞 해변은 몽돌해변이란다. 둥글둥글한 돌들은 아마도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닮아 저리도 예쁠까. 모남이 없는 둥근 돌들은 사납게 밀려오는 바닷물들을 얼마큼의 사랑의 마음으로 어르고 달래서 바다로 되돌려 보냈을까.
▲ 해품길 시작
학교를 지나니 해품길 시작을 알리는 아치형 문이 서 있었다. 참으로 아늑한 길이다. 발 아래로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걷노라니 내가 마치 바다 위를 걷기라도 하는 것 같다. 바다위를 거침없이 휘젓는 햇살에 눈이 부셔 잠깐 눈을 돌려 산기슭을 바라보면 향기 가득한 산국의 낡은 자태가 보이고 꽃이 진 구절초의 고풍스런 자태도 보인다. 꽃향유는 열매집 마저 털털 털어낸 몸짓으로 나를 바라본다. 모든 일 다 해 냈다는 의젓한 폼이다.
▲ 뒤돌아 본 폐교
▲ 참으로 다감한 길
▲ 동백나무 군락
▲ 파고라전망대
대나무 터널을 지나고 억새초원을 지나며 하늘을 바라보고, 바다를 바라보고, 숨을 고르며 천천히 오르다 보니 갑자기 확 트인 풍경이 나타난다. 저 먼 바다위의 홍도와 대마도까지 보인다는 파고라전망대다. 진정 마음이 뻥~~ 뚫리는 풍경이다. 가까이는 등가도가 보이고 조금 멀리 홍도가 보인다. 대마도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햇살 가득히 받고 있는 장군봉 오르는 길을 바라보노라니 참으로 아늑하다 저 길을 한 없이 걷고 싶다. 산등성에는 동백나무들이 둥글게, 둥글게 모여 살고 있다. 저희들끼리 뭉쳐서 바닷바람을 이겨 내는가 보다. 고난을 이겨내는 모습이 이토록 아름다워 보이다니!! 그러고 보니 이 길은 海도 품고, 해(태양)도 품은 길이었네!!
▲ 꽃 진 층꽃나무는 바다를 향해 그리움을 실어 보내고...
▲ 층꽃나무
▲ 삼여도(앞)와 어유도(뒤)
▲ 동백꽃이 정말 예쁘다
▲ 장군봉의 철탑이 보인다.
▲ 천남성 열매
독이 있어 만지면 위험하다.
▲ 산국
잎은 낡았지만 꽃은 아직 싱싱하다.
섬에서 살아가는 기품일 것이다.
▲ 대항마을 갈림길
파고라 전망대에서 남편은 되돌아 내려갔다. 이곳까지 만이라도 함께 해 줘서 고마워요~ 조심해서 내려가라고 당부하고 나는 전망대를 지나 해, 해 두 해를 품은 길을 지나 동백나무 사잇길을 걷고 나니 길이 아래로 뚝 떨어진다. 이곳에서 장군봉을 다시 올라야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11시 30분 배를 타고 나가기 위해 대항마을로 내려가는 곳이다. 나는 내처 장군봉으로 올랐다. 2시 배를 예약했기에 시간이 충분 했을 뿐 아니라 섬 어느 곳 하나라도 놓치기 싫었다.
▲ 사스레피나무
▲ 간신히 피어있는 꽃향유
장군봉은 얼마 전에 종방 된 병원선 드라마 촬영장소이기도 하단다. 우연하게 그 드라마를 재밌게 봤는데… 이러려고 그랬던가 싶다. 안부에서 다시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섬 특유의 사스레피 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는 조금은 단순한 길이었다. 조금 오르니 어유도전망대 이정표가 보인다. 지체 없이 전망대에 올랐다.
대항마을도 보이고 '매물도의 오륙도'라는 삼여도, 그리고 물고기가 너무 많아 바닷물이 마를 정도였다는 전설이 있는 어유도가 보인다. 어유도는 6가구 정도가 거주했었는데 지금은 섬의 자연 환경을 지키기 위해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무인도가 되었다고 한다.
▲ 삼여도와 어유도
▲ 대항마을
▲ 천남성 열매가 많이 보였다.
촘촘한 열매가 조금 무서워 보이는 이유는 독성 때문일까?
▲ 사위질빵이 멋진 폼으로 씨앗을 날리고 있다.
▲ 장군봉
난간 뒤의 섬이 소매물도.
장군봉에 올랐다. 210m의 봉우리는 이 섬의 최고봉이다. 이 봉우리는 장군이 군마를 타고 있는 형상이라 군마 조각상이 있다. 장군봉은 일본군의 포진지였다가 우리 군사시설이 되었다고 하는 조금 씁쓰레한 역사도 남아 있는 곳이란다. 장군봉의 전망대에 오르니 아~ 소매물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소매물도에 전해오는 남매바위 전설이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가까운 거리의 두 섬이었다. 아련히 보이는 저 등대섬에 달려가고 싶다.
▲ 내 배낭을 말에 태웠다 (^+^)
▲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소매물도
▲ 햇살은 여한없이 바다를 비추고 있으니...
장군봉에서 오롯이 나 혼자가 되었다. 모두들 갈림길에서 내려갔기 때문이다. 혼자 있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해 보고 싶은 숨은 마음이 표현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문득 저 군마를 올라타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내 배낭을 태워 주었다. 말이 히힝~ 하며 장난을 치는 것 같다. 저 드넓은 바다를 혼자 바라보노라니 문득 선착장의 해품녀 조각상 생각이 난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해품녀 라고 하늘을 향해 소곤대니 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구름 뒤로 숨어 버린다. 나 원 참~~
이제 서서히 내려가야 한다. 소 매물도를 바라보며, 바다를 바라보며 진정한 해품길을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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