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령치
철쭉을 만나기위한 출발지
지리산이 품고 있는 풍경, 길, 이야기들은 무궁무진하다. 샘솟듯 솟아나는 지리산의 매력에 빠져 능선 따라 종주하는 산객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나로서는 상상조차 힘들다. 어쩌다 지나는 고갯마루에서 겹겹이 포개진 무섭도록 웅장하고 울창한 산의 실루엣만 바라보아도 가슴 벅차게 다가오는 풍경에 취하곤 했다. 너무 깊어 사람들로부터 유배를 당한 산, 하여 슬픈 역사의 장소로 내 몰렸던 아픈 산, 이 산을 종주는 아니어도 천왕봉까지 구간구간 다녀온 길을 합하면 얼추 종주하지 않았을까하는 자부심을 가져보곤 한다. 실제로 내 폰에 저장된 하루 걸음 수가 가장 많은 날은 2014년 8월 16일 지리산 성삼재에서 화개재를 거쳐 뱀사골로 내려온 날로, 그날의 걸음 수는 11시간 동안 45,785 걸음을 걸었다고 저장 되어있다. 아직 그 기록을 깨지 못하고 있는데 어쩌면 이제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일지도 모른다.
▲ 아주 평온하게 시작되는 오솔길 같은 등산로
▲ 뒤돌아 정령치를 다시 바라본다.
어느 산을 걷든지 걸을 때마다 햇빛에 녹아내리는 녹색의 물에 샤워하는 듯 상쾌함을 느끼곤 하는데 그런 시간들이 거듭될수록 다시 가고 싶다는 갈증에 몸을 뒤채곤 한다. 갈증의 대상은 꼭 초록이 아니어도, 산의 정체가 아니어도 시시때때 변하는 모호한 정체이니 언제 어느 곳에서 나의 갈증을 부추기고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요즈음의 나의 갈증은 지리산 바래봉 오르는 능선의 철쭉이었다. 이르거나 늦거나 하는 꽃피는 시기를 놓치기 십상인, 하여 더욱 보고픔의 갈증을 높여주는 지리산의 철쭉을 보러 언니를 따라가기로 했다. 언니는 친구와 함께하기로 했던 것인데 언니는 보통사람을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체력이기에 새벽같이 출발하여 보통 5~6시간 걷는 산길을 10시간 이상 걷는 계획을 세웠단다. 나 역시 아직은 체력이 힘든 때~~ 지난 토요일 언니를 따라가기로 했다.
▲ 우리를 맞이하는 문지기 철쭉
오늘 힘든 여정임을 우리로 하여금 쉽게 익히도록 수줍게 피어있다.
▲ 어찌 이리도 고운 빛일까
아마도 산중 이른 새벽에 날마다 이슬로 세수를 했을 것 같은 고운 모습~~
우리의 가는 길은 정령치에서 바래봉까지의 계획으로 절대 남들을 따르지 않고 우리 페이스대로 걸어야한다는 신념을 굳게 했다. 출발할 때의 이른 시각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홀가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산악회 혹은 개인단체 사람들이 쏟아져 오르면서 우리는 점점 추월을 당했고, 길을 양보해야만 했다. 등산로는 좁았다. 오직 한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등산로는 한 줄로 서서 걸어야했고 행여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이라도 만나면 한 곳에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으며, 조금 힘들어 뒷사람에게 양보해 주려고 잠깐 섰다하면 2~30명은 그냥 보내야만 하는 실정~~ 와!! 사람들의 무게에 지리산의 높이가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두 철쭉을 만나고 싶어 하는 꽃마음 들이기에 몸도 훨씬 가벼울 것이니 지리산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 내가 지나온 봉우리들
▲ 바위길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부드러운 산죽 길을 걸을 때도 있다.
등산을 하다보면 산을 만나는 기쁨도 있지만 낯모르는 사람들일지라도 우리 인간 본성의 선함을 만날 수 있어 더욱 즐겁다. 서로 힘듦을 위로하고 풍경 좋은 곳에서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가파른 곳에서는 서로 이끌어 주기도 하면서 산 이야기로 스스럼없이 사귈 수 있음은 모두의 숨결에서 공통적인 감성의 결이 함께하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이 보인다.
아마도 와운마을일 듯싶다.
▲ 아무리 바빠도 일렬로 서서 걸어야하는 깊은 산속 등산로
▲ 나무의 삶이 이리도 고단한 것일까?
결코 내 현실보다 쉽지 않은 시간들을 지나왔을 것이지만
왜 내 현실보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까.
▲ 얼레지
초반에서는 군락지를 찾아가는 우리를 맞이하기라도 하듯 간간히 피어있는 철쭉을 만났을 뿐이다.
대신 야생화들이 나를 반긴다. 깊고 높은 산에서 살아가면서도 어찌 그리 해맑고 예쁜, 특이한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지… 참으로 반갑기만 하다.
▲ 이정표마다에서의 인증 샷
▲ 아! 멀리 보이는 철쭉군락지
오른쪽 봉우리가 바래봉! 저곳까지 가야하는데......
날씨는 화창했지만 숲 그늘에 들어서면 서늘함이 덮쳐오니 난 준비해간 옷을 껴 입어야했다. 우리가 출발한 정령치는 해발 1,172m 에 위치한다. 오늘 우리가 지나는 길에서의 다음 목적지인 고리봉은 1,305m인데 오늘 하루 중 가장 높은 곳이다. 그곳에서 부터는 점점 낮은 곳으로 향하면서 철쭉군락지인 팔랑치를 지나야 하는데… 점점 낮아지는 곳이라 해서 절대 쉬운 길이 아니었다. 올랐다 내렸다하는 구간이 엄청 많고 그 경사도가 장난이 아니게 힘든 구간이었다. 우리는 점점, 자꾸자꾸 뒤처지면서 시간을 떼어내고 있었다. 반절도 못 왔는데 계획한 10시간의 반절도 더 넘게 소요해버렸다.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도 힘이 드는지 우리더러 정령치에서 몇 시에 출발 했느냐고 자주 묻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말 못해요~ 우린 어쩌면 이곳에서 자야할지도 몰라요~~’ 하며 우스개로 답을 하곤 했다. 정말 너무 천천히 걷고 있으니 우리 시간대로 일러주면 그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 것이다. 해가 길어진 것을 위안삼아 우리는 그래도 전진했고 어느 시점에서 바라보니 먼 곳의 산등성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음이 보였다. 아~ 저기구나 어느새 여기까지 온 우리가 대견했다.
드디어 부운치 넘어 팔랑치에 도착!! 갑자기 펼쳐진 꽃무리 속에 힘듦도 싸악 녹아내린다. 철쭉은 아직 완전히 만개하지 않았다. 밑의 철쭉은 모두 졌는데 이곳에서는 활짝과 아직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좋았다. 이리저리 돌고, 뒤돌아 사진을 찍고 찍어도 또 찍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찍는 모습을 보면 그곳에서 또 찍고 싶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곳에서 머무를 수는 없다.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음에 걱정이 앞서는 마음이다. 앞으로 3시간 이상을 걸어야 하는데 지금 오후 4시가 넘었던 것이다. 서둘러 출발했다. 바람이 점점 많아지니 할 수 없이 마스크를 꺼내 착용했고 남편이 전화를 걸어와 지금 비가 내린다고, 걱정된다고 한다. 이곳은 아직 비 내리지 않는다고 안심 시킨 후 이제 마지막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어느새 다 내려갔는지 아주 조금밖에 없다. 조금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 울 언니가 혼자 내려오고 있는데 넘 멀리찍었네 ^^
▲ 울 언니와 함께
▲ 하늘이 컴컴해지고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비는 변죽만 울리고 끝내 내리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팔랑치에서부터 언니보다 앞서 걸었다. 이번에도 결국 바래봉정상 오르는 것을 포기해야한다. 몸이 힘들기도 하거니와 시간 상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것이다. 아, 지리산은 이렇게 또 나를 다시 부르는 구나! 하면서 이제는 주차장까지 1시간 30여분을 끊임없이 내려가야 했다. 산을 벗어난 길을 걷는 다는 일은 정말 힘들기도 하지만 이 길은 유난히 걷기 힘들게 닦아 놓은 것 같다. 박석 처리해 놓은 길~ 보기에는 좋은데 걷기에는 넘 불편했다. 차라리 흙길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수 없이 되 뇌이며 오후 6시 50분에 주차장에 도착했다.
▲ 바람때문에 모자를 얼굴에 동여 맸다.
한 사람이 사진을 찍어 준다 자청하기에 마스크를 얼른 벗고~~
▲ 빠르게 걷다 문득 뒤돌아 내 지나온 능선을 바라보니......
▲ 포토존이 되어준 소나무
▲ 구상나무
▲ 0.6km만 오르면 바래봉, 왕복 40분이라는 이정표가 있었지만
난 도저히 40분만에 다녀올 수 없는 고갈된 체력!
용산주차장 방향으로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 마지막 길이 정말 힘들었다.
▲ 운지사방향으로 내려가면 주차장
오늘 하루 10시간 40여 분 동안 31,933걸음을 걸었다.
걷는 동안 발가락에 쥐가 두어 번 나고 아팠지만 걸음이 안겨주는 풍요로움을 누렸다.
내 마음 안에 지리산의 철쭉을 품은 시간이었다.
▲ 빨간 선 따라 약 13km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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