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마음따라 발길따라

禮가 아니면 움직이지말라

물소리~~^ 2017. 1. 30. 21:07

 

 

 

 

 

非禮勿動(비례물동)

마이산 입구, 절벽 바위에 새겨진 글로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명절! 우리 민족의 정서가 가장 많이 내재된 풍습이라고 미화시키는 의미 뒤에는 끊임없는 몸의 움직임이 있어야한다는 강한 뜻이 있는 것 같다. 무엇을 준비하기 위해, 먹기 위해, 치우기 위해, 사람은 몸을 쉼 없이 움직여야한다는 불문율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불문율을 합리화 시켜주기 위한 것일까?

달력은 빨간 글씨로 조금은 긴 날을 쉴 수 있다는 작은 위안을 주고 있는 것인지도…

 

부산함이 사라진 명절 끝에 맴도는 허전함에 마음이 휑해지니 내 몸도 여유를 부리고 싶다는 반감이 살아 오른다. 이런 마음을 떨쳐버리고 싶으니 어디론가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 끝에 며칠 전 신문에서 읽은 마이산이 품은 역사적 사실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래 그곳에라도 다녀오자 싶었다.

 

날이 꾸무럭하더니 출발한 조금 후, 기어이 빗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하니 행여 빙판길이 될까 염려스러웠지만 이런 날씨를 즐겨보자는 심산이 우선한다. 마이산을 대 여섯 번 다녀왔지만 오늘은 마이산이 아닌 역사적 현장을 찾아보기위해 명절연휴의 하루를 빌린 것이다.

 

 

▼ 용바위

 

 

 

 

 

▲ 마이산 남부주차장으로 가는 길목 오른쪽에 용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둥근형태의 바위 중간 쯤에 흉터처럼 생긴 자국이 있는데 사람들이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친 자국이라고 한단다. 그 바위 앞 용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이끼 낀 바위 위에 1907년 9월 12일 29살 이석용이라는 청년이 올라가 일장 연설을 하였단다. ‘사사로운 정이 우리를 방해하거든 하늘이 죽음으로 응징하소서’ 라고 하늘에 고하고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했다고 한다. 이석용은 의병장 되어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했으나 1914년에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는 내용을 초라한 안내판이 알려주고 있었다. 

 

 

▼ 주필대

 

 

고려 무장이던 이성계는 남원 황산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치고 어느 날 꿈에 하얀 수염의 도인으로부터 금척을 받는 꿈을 꾸었다. 개경으로 돌아가던 중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꿈속에서 금척을 받았던 그 산이 하늘에 떠 있음을 보고 백일기도를 위해 은수사를 찾아가던 중 잠시 머문 자리라고 한다. (마이산 두 봉우리는 지금도 멀리서 보면 하늘에 떠 있는 듯 보이기도 하다)

 

이성계가 꿈에 왕권의 상징인 금척을 받고 후에 조선을 개국했다는 설화가 있으며, 또한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가사와 악보를 짓고 안무한 금척무가 있으니 이는 이곳의 자랑이라고 지금까지 전해온다.

 

 

 

▼ 대한이산묘

 

 

 

 

 

▲ 외삼문의 현판 '이산묘' 

상해 임시정부 초대부통령 이시영 친필

 

 

마이산 자락에 위치한 이산묘에는 항일순국의 충의를 지키신 한말의 거유 연재 송병선,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문인들이 선사의 유적을 추모하고 망국의 혼을 씻고자 1924년 12월에 이산정사를 창건하였으며 해방 이듬해인 1946년 9월 회덕전을 건립한데 이어 영광사와 영모사를 건립하였다. 이곳에 이산정사를 세운 가장 큰 이유는 태조 이성계가 금척을 받은 곳이기에 사라진 조선의 정기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고 한다. 이 건립을 위해 백범 김구선생이 거액을 내 놓았다고 한다.

 

 

▼ 영광사

 

▲ 영광사 현판

백범 김구 친필

 

 

영광사는 구한말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해 항일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순국선열 34위를 봉안 하였다고 하는데 한쪽 문밖에 열려있지 않아 속 내부를 모두 볼 수 없었다.

 

▼ 영모사

 

▲ 영모사 현판

해공 신익희 친필

 

영모사는 조선개국이래 충신 명현 41위를 봉안 하였다고 한다.

 

 

회덕전을 오르기 위해서는 또 한번의 내삼문을 지나야 했다.

 

 

▼ 회덕전

가장 높은 곳, 깊숙한 곳에 위치

 

 

 

국조인 단군왕검, 조선개국조 이태조, 민족문화의 중흥조인 세종대왕,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 등

4위를 봉안한 곳이다.

▲ 현판은 누구의 글씨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 회덕전에서 바라본 풍경

왼쪽 바위 아래에 주천대 글씨가 새겨져 있다. 

 

 

▲ 주필대 앞 고목

 

 

이산묘 건너편의 추모비는 김영삼 정부 때 건립한 비로

그 뒤 나무에 가려진 절벽에는 고종의 친필로 ‘비례물동“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오른쪽 입안내판이 비례물동에 대한 안내문이다.

 

 

 

 

이런 역사적인 현장은 마이산에 들어가는 남부 주차장 못미처에 있다. 하지만 뭇 사람들은 마이산의 신비함과 돌탑의 매력에 빠져 그냥 지나치곤 하기에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탑사까지는 다녀오고 싶어 걸어 올랐다. 상당한 거리를 걸어야했지만 상쾌한 공기에 발걸음이 가볍다.

 

 

▼ 금당사 ▲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삼고 시작한 사찰로 마이산 남부에 위치한 백제고찰이다.

초창기에는 금당사라는 이름답게 지붕까지도 금색칠을 한 것 같았는데 이제는 다 벗겨진 것 같다.

금당사에는 숙종 때 그려진 가로 5m, 세로 9m의 거대한 괘불탱화가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 벚꽃이 필 때면 아주 장관을 이루는 풍경으로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다 모여든다고 하는데

오늘은 안개로 마이산 모습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얼어 있으니 투영된 그림자도 못 만들 바에는 아예 모습조차 보여주기 싫다는 일편단심인지…

 

 

 

 

 

 

 

 

 

 

 

 

 

▲ 탑을 쌓은 이갑룡 처사

바람에 흔들리기는 하나 무너지지 않는 신비의 돌탑

이갑룡 처사가 쌓았다고 하는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닌가.

 

 

 

 

▲마이산 능소화

얼마만큼의 세월을 견디어온 것일까.

줄기가 마치 나무처럼 굵직하다

7월이 되면 암벽에서 주황색 꽃을 피운다하니 그 화려함은 어떨까.

상상만 해도 황홀하다.

 

 

▲ 줄사철나무

이곳 군락지의 줄사철나무는 천연기념물 380호로 지정되어있다.

 

 

▲ 내가 오늘 만난 역고드름

 지난해 2월 2일 역고드름 홍보 ▼

바람의 방향과 속도, 기압 등의 원인으로 생겨나는 역고드름 현상

이만큼 지역적으로 오지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겠으니

사람들은 돌탑과 함께 신비의 힘으로 말하고 있다.

 

 

▲ 약수가 말라 있었다.

 

 

 

 

 

은수사에는 예전에 둘러보고 그곳의 역사적 가치를 내 나름대로 음미해 보았기에 오늘은 그냥 되돌아 내려갈 참이다. 다음 행선지인 죽도에 대한 시간적 여유가 빠듯하기도 했지만 은수사까지 오르는 길이 넘 미끄러웠고, 잔잔한 비에 우산을 챙기지 못하였기에 다시 주차장까지 상당한 거리를 걸어야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예전 은수사 글 ☞  http://blog.daum.net/panflut0312/3481077

 

 

 

마이산 주차장을 출발하여 20여 km 를 가면 한 작은 마을 오지에 죽도라는 곳이 있다. 섬이 아닌 지명이 죽도다. 내비조차 검색을 못하는 곳! 그곳은 조선 선조 때의 그 유명한 기축사화 주동인물인 정여립이 죽은 곳이라 하였다.

 

정여립에 대한 후세인들의 평가는 혁명가인지. 아니면 반역자인지 아직도 묻혀 있는 수수께끼라고 한다. 다만 이곳 마이산이 이성계가 이룩한 금척이라는 역성혁명의 근거가 있는 곳이기에 혁명가라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4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직도 명확한 설이 없다고 한다. 마치 지금 내가 찾아가는 길이 안개에 싸인 것처럼 오리무중인가 보다. 하니 하늘도 감히 나의 억측을 어렵게 하기위해 길을 뚫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사건을 빌미로 정여립의 가계는 삼족이 멸하였으며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이 역사 속에서 삭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지울 수 없는 곳은 그가 죽었다는 장소, 죽도였던 것인데 이제 그마저 차츰 잊히고 있는 것 같다.

 

어렵게 마을 입구까지는 갔지만 그곳부터는 걸어야하며 그 장소의 존재가 희미한 터라 찾기도 어려울 거라는 설명을 마이산 안내원으로부터 들었기에 어쩌면 쉽게 포기하는 마음이지 않았나 싶다. 남편은 좋은 날씨의 시절에 한 번 다시 오자며 차를 돌린다.

 

▲ 저 계곡 끝자락 어느곳이 죽도일 것 같다

그곳에는 폭포가 있다고 들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며 정여립에 대한 생각을 역사시간에 배운 내용으로 반추해 보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여립을 사형시킨 자는 송강 정철이었다. 조선시대 3대 시인 중 1인으로 문학적 업적이 지대하여 국어시간에 수없이 배웠던 사람이기에 놀랍기만 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철 역시 정치적으로 부침을 참 많이 당한 사람이었다. 모두가 당파의 마찰에서 빚어진 것이다. 왕(선조)의 미움과 이쁨을 번갈아 받기도 하고, 죽어서도 관직을 박탈당했다가 또 다시 내려지기도 하며 살아온 정철! 같은 정씨이면서도 정여립의 정字와 관련된  1,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죽게 한 기축년 사화였다.

 

역사 속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던가? 사람과 방식들은 변했지만 권력에 대한 집착과 정적들에 대한 응징과 처벌이라는 式은 변하지 않고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문득 고종의 친필인 비례물동이 번개처럼 스친다. 이곳 마이산 골짝 어느 곳에 내려진 그 글의 내용은 우연이 아닌 필연 같았다. 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이성계에게도, 정여립에게도, 순국열사들에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향한 일갈은 우주의 진리처럼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