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을 자다 뒤숭숭한 꿈을 꾸었는가 눈을 떴는데 정신이 번쩍 든다. 아니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하는 절망감에 잠이 싹 달아난 것이다. 불을 켰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새벽산행도 잊고 지내고, 책 한 권도 알뜰히 읽지 못하고 있고, 그렇다고 집안 일 번듯하게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 도대체 나는 뭐란 말인가! 느닷없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머리맡에 놓인 한 수필집의 글 두 편을 읽었지만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시 자리에 누우니 폭염 지나간 계절의 한 밤 기온은 그새 바꿔 덮은 부푼 이불을 끌어 올리게 한다. 눈이 부시다. 다시 일어나 불을 끄고 스탠드 스위치를 눌렀다. 종이 갓을 타고 은은하게 걸려나오는 불빛에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듯싶다. 어디선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을이다. 허전해지는 마음을 이불자락과 함께 뒤엉켜 끌어안고는 또 살짝 잠이 들었나보다.
평상시 일어나는 시간에 눈을 뜨고 아침식사를 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업무가 월초 일이 많은 특성이기에 사무실에 나갈 참이다. 주차장에 내려섰는데 차 뒤편 화단의 석류나무에 달린 석류가 눈에 들어온다. 아직 설익은 풋풋함이지만 그냥 정겨워 고개를 한껏 젖히고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장독대 옆에 석류나무가 있었다. 꽃 지고 잎이 무성할 때는 나무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내다가 열매가 익어갈 무렵인 요즈음 때부터는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그 열매가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부풀대로 부풀다가 어느 순간 제 스스로 몸을 쫙 열고 속을 내 보이는 모습이 마냥 신기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이 보석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저렇게 벌어질 때 석류는 무슨 소리를 낼까, 저 단단한 껍질을 어떻게 찢을까, 그런데 알갱이들은 왜 쏟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자주 들여다보며 장독대에 앉아 있기도 했었다.
이런저런 생각들만으로도 내 입안에서는 신물이 고인다. 저들의 살아가는 비밀은 여태 알지도 못하면서 그 신맛은 기억을 하며 침을 고이게 하고 있다. 문득 지난밤의 뒤숭숭한 마음들에도 신맛이 끼쳐 오는 듯싶다. 정신이 깜짝 놀라 깨어난다. 지금이라도 추스르고 살아가면 되겠지,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복이 겨워 다른 사람들의 누림을 취하고 싶어 하는 마음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석류의 형태는 달라보여도 속으로 품은 알갱이의 탄력성과 신맛은 그대로이지 않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애면글면하며 지내고 있을까? 아픔으로? 아픔도 어쩌면 내 숙명인 것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토요일 아침, 지난 밤 꿈의 번뇌를 석류의 상큼한 맛에 씻어본다. 나도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자라는 나의 특성의 맛을 잃지 않으며 살아가고 싶다.
'내맘의 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계절따라 나선 길 (0) | 2017.04.20 |
---|---|
그림자의 이야기를 듣다. (0) | 2016.11.29 |
나를 일으켜 세우는 그 무엇 (0) | 2016.08.16 |
설 명절을 보내고 (0) | 2016.02.10 |
고통의 승화로 피어난 가시연꽃 (0) | 2015.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