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초당 / 김승옥
사진출처 : 인터넷
아무리 더운 날씨의 연속이라 하지만 아픔이라는 그럴싸한 변명을 달고 지내면서 모든 것에,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군림하고 지내고 있는 요즈음, 순간적으로 물밀 듯 밀려오는 허전함으로 허방을 딛는 존재의 가벼움에 빠져들곤 한다.
연휴 마지막 날 오후, 무력감을 이겨내려고 이제 개학을 앞두고 있는 큰 아이의 근무처인 학교를 둘러보았다. 물론 오가며 스치는 풍경에 답답함을 풀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담하게 잘 가꾸어진 교정을 바라보며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 나오면서 기분 전환을 했다 싶었는데 허전함은 여전하다.
도대체 이 기분은 뭐람? 의사는 스트레스 받지 말고 즐겁게 일상을 보내라했는데 나는 지금 역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오늘 광복절 시너지도 금방 소진되었나보다. 하릴 없이 책꽂이 앞에 앉아 꽂혀진 책등을 눈으로 훑어 내려오는데 한 제목이 눈에 꽉 박힌다. “무진기행” 이었다.
김승옥의 소설집이다. 나도 모르게 책을 뽑아들었다. 최근 이 작가의 근황을 여러 매체를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등으로 1960년대 한국 현대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2003년 2월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이문구의 부음을 접하고 장례식장으로 가려고 나섰다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졌다고 한다.
후유증으로 마비도 있었고 거동이 불편했지만 꾸준히 재활치료를 받은 결과 혼자 외출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 되었지만 언어장애와 사고 기능에 어려움이 있어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그 절망의 경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던 것이다.
작가는 소설가이자 만화가였을 뿐 아니라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였다고 하니 그는 다방면에 걸친 재능을 타고났음 이라고 하면 진부할까? 언어를 잃어버리고 섬세한 감성을 잃은 대신 그는 또 다른 재능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그린 그림으로 지난 7월에는 전시회까지 했다하니!! 이건 그의 재능도 재능이지만 하나를 잃은 상실감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이 일어나는 힘을 키운 자신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의지 앞에서는 맹렬히 공격해오는 상실력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힘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토막 글로, 이어지지 않는 문장으로, 간신히 필담으로 의견을 소통할 수 있는 경우지만 또 다른 그림이라는 출구를 찾아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던 작가는 아직도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고 한다.
책꽂이 앞에서 화들짝 일어났다. 비록 나는 내가 가진 재능은 없지만 무기력함에서 일어날 수 있는 힘은 있을 것이라고 나를 추켜세우며 책에 실린 소설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새롭게 다가오는 내용들에서 작가의 의지를 만나고 있다 생각하니 나에게 서서히 다가오던 왠지 모를 슬픔도 사치스럽다고 천천히 물러나고 있음을 느낀다. 내 아픔은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재발에 대한 두려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잠시 잊고 있었던 내 역할에 충실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내맘의 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자의 이야기를 듣다. (0) | 2016.11.29 |
---|---|
석류의 상큼한 맛에 마음을 가다듬다. (0) | 2016.09.10 |
설 명절을 보내고 (0) | 2016.02.10 |
고통의 승화로 피어난 가시연꽃 (0) | 2015.08.16 |
물방울그물의 아름다운 힘 (0) | 2015.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