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시연꽃
광복절이다. 아침 일찍 태극기를 달고 오늘의 의미를 새겨보았지만 우선은 내 몸이 기운이 없고 힘드니 별다른 감흥도, 특별한 나라 사랑의 마음도 일지 않는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남편이 오랜만에 기분 전환도 할 겸 드라이브하자고 한다. 사실 지난 4월부터 외출을 하지 못한 생활이었다. 나로 인하여 가족 누구의 생활리듬이 깨지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늘 함께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궁남지로 달려갔다. 햇볕 쨍한 날씨와 기운 없는 나 때문에 주차장 부근의 연꽃만 돌아보기로 했다. 넓디나 넓은 연밭의 수많은 연꽃들은 어떤 자태이든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다웠다. 어느새 활짝 핀 모습보다도 연밥을 더 많이 달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마음이 가벼워진다. 연은 스스로 꽃잎을 떨어트리며 연밥을 야무지게 익히고 있었다. 커다란 연잎위에 가지런하게 떨어진 연꽃잎에 스며있는 정갈함에는 기품이 서려있었다.
연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는 오므라든다. 오므리는 힘이 없을 때에는 스스로 꽃잎을 떨어뜨린다. 영화로움을 스스로 거두어들일 수 없을 때 미련 없이 떨어지는 모습은 우리 사람들의 귀감이 된다. 누군가는 저 떨어진 여린 꽃잎을 소주잔으로 한다고 했던가.
외개연, 수련, 물양귀비, 열대수련 등 갖가지 희귀한 고운 자태의 연꽃사이를 찬찬히 걷다 갑자기 내 눈길이 딱 머무는 곳이 있었다. 어쩜! 가시연꽃이었다. 여기에 오는 동안 내심, 가시연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었는데 들어선 길목이 가시연꽃 밭이었던 것이다. 신난다! 몸이 화들짝 깨어난다.
아! 가시연꽃! 다른 연못에 비해 훨씬 작은 연못은 가시연의 널따란 잎으로 가득 덮여있었다. 그 잎을 뚫고 뾰족 하게 몸을 세우며 갓 피어난 가시연꽃! 난 그만 숨이 멎는 듯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그들과 조우했다. 온 몸에 돋은 가시로 인하여 강하게 보였지만 여리디 여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저토록 독함을 선택한 모습이 죽도록 서러워 보였다. 한없는 외로움을 보았다.
제 꽃을 피우기 위해 한 해 한 번씩 저토록 큰 잎을 힘겹게 피워 내는 것도 신기하지만 왜 가시 달린 연잎을 피워내는 것이며 그 가시 잎을 뚫고 나오기 위해 제 몸에 가시를 박아야만 하는 것일까. 무엇에 대한 열정이 이토록 저들로 하여금 인내의 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그 고통 끝에 저리도 아름다운 신비의 보랏빛 꽃을 피워내는지…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는 내 모습이 객쩍어 마음이 혼란스럽다. 눈길 머무는 곳마다 갖가지 모습으로 아직은 조그맣게 피어난 가시연꽃들을 바라보노라니 마음 한쪽에서 슬프고 잔잔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흐른다.
작곡가 베르디가 성경이야기를 가극화한 내용의 합창곡이다. 바벨론의 왕에게 잡혀간 유태인들이 고된 노역과 핍박 속에서도 굴 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며 고향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고통을 참아내는 마음 끝에서 이런 아름다움 마음의 꽃이 필까.
힘겨운 노예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고국을 그리워하는 유태인들의 염원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작곡가 베르디의 조국 이탈리아는 그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제 하에 있었다. 베르디에게도 조국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에 히브리노예들의 고통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창조하였고 통일을 염원하는 이탈리아 국민들은 이 노래를 국가처럼 애창하여 꽃피우며 사랑하였다고 한다.
핍박의 고통을 아름다운 노래로 승화시키는 마음과, 가시를 뚫기 위해 가시로 치장한 몸으로 피어낸 꽃이 저토록 아름다운 것은 고향과 조국에 대한 열정이 있었듯 가시연꽃도 분명 그 무엇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광복절, 문득 가시연꽃과 노예들의 합창곡을 연계함은 우연일까? 어쩜 내 마음의 간절함을 노예들의 고향에 대한 간절함으로 비유했을 것이다.
내 마음 안에 어떤 간절함을 담을 수 있을까. 그 간절함은 어떤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음악을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지난 내 생의 한 순간 내 머리위에 가시 박힌 커다란 잎이 드리운 적이 있었다. 난 그 때 내 몸에 가시를 세워 그 잎을 뚫고 나오려하지 않고 잎 밑에 숨죽이며 숨어 있었다. 잎 스스로 가시를 없애고서 나의 길을 터 주었을 때 나는 슬그머니 나와 잎과 동행을 했고 그러한 내 행동을 기다림의 미학으로 믿었고 잎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의 기다림을 인내의 극치라 칭찬해 주었다.
오늘 가시연꽃을 바라보며 내 행동을 반추해 보니 참으로 부끄러운 마음이다. 그 때 내가 내 몸에 스스로 가시를 세우는 용기로 잎을 뚫고 나와 잎의 고통에 동행을 했었다면 어쩌면 저 연꽃의 보랏빛 고운 꽃처럼 지금보다 훨씬 나은 내 생의 찬란한 꽃을 피웠을지 모르겠다. 그 당시 내 행동은 분명 기다림의 미학이 아니다.
나의 책임이 아니라고 회피한 나약함이었다. 앞으로 나는 얼마나 살 수 있을까. 남은 날들 중 어느 날 또다시 가시 돋운 커다란 잎이 내 위를 덮어 온다면 그 때는 크게 용기 내어 내 몸에 가시 한번 돋우어 커다란 잎을 뚫고 나와 고통을 분담하리라. 저만치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남편에게 오늘 가시연꽃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는지 묻고 싶다.
#. 궁남지에서 가시연꽃을 보고 예전의 글을 각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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