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자락길에서 내려와 점심을 해결하고자 식당을 찾았지만 마땅치가 않았다. 겨우 한 곳, 국수종류만을 파는 곳이 있었다. 실내가 아닌 건물 옆에 몇 개의 탁자와 파라솔을 받쳐놓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꽤나 괜찮은 분위기였다. 마치 한여름 논밭두렁에 앉아 새참을 먹는 기분일까? 음식을 주문하고 앉아있으려니 바람결을 타고 내려오는 햇살이 퍽이나 유순하다.
이리저리 풍경을 눈으로 구경하는데 저쪽의 키 높은 나무 한 그루에 노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아, 살구나무! 라고 감탄을 하니 남편은 옆에서 살구나무가 저렇게 크냐고 묻는다. 언뜻 스치는 추억 하나를 끄집어내며 나는 물론이지! 대답한다. 그러고 보니 땅위에도 살구가 제법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까워하는 나를 대신하여 남편은 살구를 주우러 간다.
노란빛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황빛도 아닌 빛깔, 정말 그대로 살구빛이라 부를 만큼 개성적인 빛, 은은함을 품어내는 살구빛이 난 정말 좋다. 그 빛에는 내 아련한 추억의 빛도 스미어 있다.
아마도 초등 2학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았던 관사는 제법 큰 저택이었고 뜰에는 과실수가 여럿 있었다. 감나무 2그루, 석류 2그루, 대추나무, 추자(호두)나무, 우물가에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었다. 배가 나오도록 옷을 가볍게 입고 있었을 때이니, 아마도 살구가 익는 요즈음이었을 것이다. 마루에서 저녁을 먹고 나는 살구나무 아래로 갔고, 웬일인지 살구나무를 오르고 있었다. 눈앞에 탐스럽게 익은 살구가 손에 닿을 즈음, 나는 그만 주르륵 나무 아래로 떨어졌고 놀라신 아버지가 뛰어 나오셨다.
나는 땅에 엎드린 자세로 떨어졌고 맨살이 그대로 땅에 닿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놀란 마음을 거두시고 ‘머스마가 되려고 그러냐?’ 우스갯소리를 하셨다. 초등 2학년이면 기억이 흐릿할 터인데도 난 그 말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이다. 야단이 아닌, 내가 다치지 않음을 다행이라 여기시는 여유로움에서 하신 말씀이신 걸 그 당시에도 느꼈던 것 같다. 퍽이나 놀란 마음으로 울먹하다가 그냥 안심했던 기운이 지금 순간에도 내 몸을 타고 흐른다.
주어온 살구는 그리 성한 육질이 아니었지만 탐스러웠다. 집에 가져와 식초 물에 몇 번 헹구어 입안에 넣고 살짝 깨무니 아, 포근함으로 짝 갈라지면서 까만 씨앗을 먼저 보여주며 잘 익었다고 알려준다. 포근한 달콤함과 새콤함이 입 안 가득 번진다. 정말 추억의 맛이다. 살구를 보면 나무에서 떨어져 땅에 엎어져 있던 그 순간의 그림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치하면서 내 감성을 자극한다. 은은한 살구빛으로 떠오르는 나의 낡은 추억은 그 맛 그 모습 그대로 새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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