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성대군 서낭당
충북 단양에서 경북 풍기로 넘어가는 길, 죽령을 넘는다.
고개가 아닌 4.6km에 달하는 긴 터널이다. 이곳 죽령길은 해발 698m로 1,800여 년 전 처음 열렸음을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죽령이란 고개이름은 이 길을 개척하다 순사한 신라인 죽죽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고 하니, 사람의 손에 만들어진 길들은 그렇게 긴 역사를 지닌 연속성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음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자동차가 다니기 전, 이 길은 무척 중요한 교통로였다. 한양에 과거시험을 보기위한 선비들이 넘었고, 보부상들이 사시사철 넘었던 고난의 길을 나는 자동차로 순식간에 지나치고 말았다. 오늘 나는 이 죽령이란 예스런 이름의 고개 길이 아닌 이 고개를 넘어 닿는, 한이 서린 장소를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길이라고 말할까? 소백산 자락길을 걸으며 음이온을 마셔보자 집을 나섰지만 이왕 나선 길, 인근의 역사 현장을 찾아가고픈 내 마음이 내 몸의 아픔보다 우선했다.
경북 영주군 단산면 단곡리 두레골에는 죽어서 소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금성대군을 기리는 서낭당이 있다. 그곳은 비밀스럽고 신령스런 장소이어서 일까? 내비조차 찾지 못하는 길이었다. 할 수 없이 서낭당과 지근거리인 장안사를 안내해 달라고 내비에게 다시 부탁했다. 내비도 그곳은 알고 있다는 듯 ‘길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명쾌하게 응답한다.
스쳐 지나는 길가의 짙푸른 나무들은 제가 품은 초록의 힘을 주체 못해 쏟아내는 듯 거칠 것 없다. 저들이 품어내는 초록에 내 몸을 맡겨보고 싶어 차창을 살짝 내리니 바람을 가르는 윙윙 소리에 잠시 혼란스러운데 훅 끼쳐오는 밤꽃 냄새가 계절을 분별케 한다. 문득 저 밤나무들이 맺는 열매의 주인들은 누굴까? 정의를 위해 제 목숨을 아낌없이 던진 혼을 찾아가는 길에서조차 소유욕을 보이는 내 작은 마음이 밉다. 얼른 창을 올리고 만다.
오랜 시간 뒤에 장안사에 도착, 강렬한 초여름 아침 햇살을 남김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단출한 경내를 지나 서낭당 가는 길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 사이 경차를 타고 온 두 여인이 장안사 식구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다시 나와 내려간다. 나는 한참을 찾다 결국 어렵게 한 사람을 만나 서낭당의 위치를 물으니 조금 내려가면 왼쪽 숲에 있다고 한다. 벌써 그곳을 지나쳐왔던 것이다.
▲ 서낭당은 장안사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 단출한 장안사
서붓서붓 다시 길을 내려오자니 아! 왼편의 숲에 서낭당이 보였다. 작은 계곡의 다리를 지나 초록빛 숲 그늘에 아담하게 서있는 전각이 보인다. 그런데 아까 장안사에서 내려온 두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무심코 철문을 지나 서낭당 전각 앞에 섰지만 두 여인들의 모습에 자꾸 주춤거려진다. 그이들은 촛불을 켜고 막걸리?병을 앞에 두고 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저 여인들이 내려가면 할 것이라 조용히 기다리면서 눈을 돌려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잠깐 동안에 내 아는 상식을 동원해 역사 속으로 들어 가본다.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하면서(1457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던 그해, 단종의 또 다른 삼촌이며, 세조와 형제인 금성대군이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이유로 이곳 순흥 땅으로 유배된다.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의 자리에 오른 세조는 금성대군에게는 더 이상 兄이 아니었다. 유배지인 이곳 순흥에 내려와서도 금성대군은 비밀리에 단종을 왕위로 복귀시키려는 거사를 계획한다.
이에 순흥 땅을 다스리던 부사 이보흠을 비롯해 수많은 영남의 선비들이 가세했다. 일체의 사심 없이 선비로서 지켜야 할 도리라는 무기만으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명분 이었지만 결과는 참혹한 비극이었다. 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노비의 밀고로 발각이 되어 가혹한 보복을 당한다. 금성대군은 물론 그를 따랐던 수많은 선비들이 참형을 받았으니 이 모두를 죽음으로밖에 다스릴 수 없었음은 그만큼 세조가 왕위에 올랐음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는 사건일 것이니…
숲 그늘 짙은 곳의 서낭당에는 두 개의 전각이 서 있었는데 가운데에 금성대군신당이, 오른쪽으로 자그마한 산신각이 있다. 신당에는 금성대군의 피 묻은 돌이 있다고 하는데 문이 잠겨있다. 아니 저 여인들은 분명 문을 열고 무언가를 들여놓고 다시 닫았다. 그 앞에 앉아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기도 하였다. 산신각의 문은 다행히 열려 있었는데 아마도 소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금성대군이 호랑이를 곁에 두고 있는 그림?이 보였다. 이윽고 그이들이 내려갈 준비를 하면서 내가 전각을 둘러보며 조금 더 머물 기세임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그녀들은 자기들이 나가면서 문을 잠가야 한다고 한다.
아, 내가 운이 좋았구나. 저이들이 아니면 난 이곳을 들어올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장안사에서 열쇠를 받아와 문을 열고 들어온 저이들은 어쩌면 무속인일지도 모르겠다. 서둘러 사진 몇 장을 찍고 그녀들과 함께 나오려니 그이들이 설명을 해준다.
이곳 사람들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년 정월대보름이 되면 한 겨울임에도 계곡의 얼음물에 목욕을 한 제관이 황소를 잡아 제물을 받치고, 소지를 태워 하늘로 날리는 제를 지낸다고 한다. 정의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금성대군의 혼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이곳 금성대군 신당은 영험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도의 명소로 무속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고 하니 그 여인들도 무속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해 본다.
역사는 거짓을 알려주며 참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하는 길의 연속성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 옛길을 걸어 보고픈 마음으로 머언 시대의 사람들 마음과 함께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서낭당을 찾았다.
▲ 서낭당에 서린 엄숙한 분위기
▼ 산신각
▲ 금성대군이 소백산 산신이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 금성대군당
▲ 금성대군의 피가 묻은 돌이 있다는데 볼 수 없었음
▲ 저 나무밑의 돌 위에서 소를 제물로 받친 곳이라 함
▲ 굳게 잠긴 문,
나는 운좋게 두 여인을 따라 들어갈 수 있었다.
▲ 서낭당의 설명
▼ 소수서원 옆에
서낭당과 다른 신단이 있다
▲ 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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