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마음따라 발길따라

제주도 산천단에 고하다.

물소리~~^ 2015. 3. 22. 22:30

 

 

 

 

 

 

▲ 산천단의 곰솔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인연의 끈을 이어가는 것처럼 신비한 일이 있을까. feel통에서 글을 통한 feel의 소통은 깨알 같은 잔잔한 감동을 안겨 주었었다. 이제 비록 공간은 사라졌지만 그 공간을 꽉 채웠던 잔잔했던 감동은 큰 울림이 되어 우리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고 있다.

 

먼 나라에 계시지만 그렇게 이어진 좋은님께서 고국의 제주도 올레길 완주를 위해 3월 1일에 제주도에 오신다는 연락을 진즉 받았다. 몇 몇 분들과 연락을 하고 일단은 합류하기로 했으며 그 날짜를 3월 20일로 정하였다. 20일 오후 제주 공항에 도착하여 21일에 올레길 17코스를 완보하고 22일 오전에 헤어지기로 하였다.

 

서로 간에 바쁜 시간을 맞추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일단 계획을 세워놓고 진행하자는 나의 속셈이었다. 하나씩, 조용히 진행을 했다. 비행기를 예약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간단한 가방을 살금살금 꾸려 놓으며 날짜를 셈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덜컥 아파버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심하게 아파본 적이 없었기에 겁이 더럭 났다. 아픔도 아픔이지만 행여 약속한 날짜를 지키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며 속히 낫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행히 며칠 앞두고 아픔은 나았기에 조심스런 몸가짐으로 덧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복병은 또 다른 데에도 있었다. 꽉 채운 이틀이지만 날짜 상으로는 2박 3일을 비우는 일정이기에 집안 단속에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남편 혼자 집에 있으니 반찬을 준비해 두어야함은 당연했지만 왜 갑자기 이것도 정리해야하고 저것도 정리해야하는 마음이 되는지 모르겠다. 참 나도 별나다 하면서도 하는 일들을 멈추지 못했다.

 

더구나 재작년에 친정에 혼자 잠깐 다녀오는 동안 가스 확인을 잘못해 냄비를 태워 온 집안에 냄새가 배여 곤욕을 치룬 기억이 남았기에 특별단속을 해야 했다. 하여 현관에 ‘가스확인’ 이라는 글씨를 써서 달아 놓았다. 외출할 때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라는 의미에서다. 그걸 본 남편은 한바탕 웃었지만 떼어내지 않는다. 일단 안심이 된다.

 

금요일 오전 근무를 하고 오후에 드디어 비행기를 탔다. 제주공항에 오후 3시 30분경에 모두 만나기로 했지만 우리 비행기의 이륙지연으로 4시 넘어 만났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시간을 활용하고자 내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었다. 유홍준님의 문화유적답사기에서 힌트를 받아 산천단과 와흘 본향당 그리고 조천의 연북정을 답사하고, 저녁을 먹고 숙소로 가는 계획이었다. 물론 그 일정만큼은 택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공항에서 산천단까지의 택시 이동은 수월했다.

 

문화유적답사기에 의하면 탐라국시대부터 백록담까지 올라 산신제를 올렸으며 고려 때부터 나라가 주관하는 제례로 발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백록담까지 오르는 도중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으니 조선 성종 때 부임한 제주목사 이약동이 지금의 위치에 제단을 만들고 산신제를 지내게 했던 곳이며, 산천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산천단 주변에는 수령 500년이 된 곰솔 8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하니 더욱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산천단을 둘러보고 길가에 나와 서서 택시를 타려했지만 도무지 빈 택시를 잡을 수 없었다. 후에서야 그 도로가 차들이 씽씽 달리는 5.16 도로였음을 알았다. 할 수 없이 메모해 간 콜택시번호를 돌려 청한 후, 한참을 기다렸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완전한 착오였다. 하지만 다음 날 17번 코스를 돌면서 본향당을 만날 수 있었으니 어쩌면 산천단에 먼저 들러 인사한? 우리에게 행운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 우리가 2박 할 숙소

▲ 숙소 벽면 커다란 액자에 가득 채워진 외화들

외국인들이 많이 머물렀다는 증거?

깔끔하고 편리한 숙소였다.

 

 

▲ 2박 3일 동안 우리집 파수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