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산에서 맞이한 해맞이
한 해의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TV를 통해 음악회를 시청하고 있었다. 첫 곡으로 연주하는 엘가의 위풍당당한 행진곡의 경쾌함을 들으면서 그래! 우리는 나름대로의 당당한 행진을 했던 한 해였다고 스스로 위안을 받았다. 연이어지는 재야의 종소리를 세 번째 까지 들었던 것 같은데 잠이 들었다. 똑같이 잠을 자고 똑같은 시간에 눈을 떴는데 새해라니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바라보니 간밤에 눈이 살짝 내렸나 보다. 차들의 지붕에는 눈이 얹혀 있는데 도로는 까맣게 제 모습을 들어 내보이고 있었다.
내 마음은 부지런히 산행시간을 저울질한다. 어떻게 할까? 지금 다녀오면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해 뜨는 모습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눈이 내린다면 흐린 날씨에 어차피 뜨는 해는 볼 수 없을 것 아닌가? 하지만 바람이 몹시도 차갑게 느껴져서 식사 후 산을 오르기로 했다. 부지런히 떡국을 끓여먹고 설거지를 마치고 산을 올랐다.
평소보다 두 시간여 늦게 올랐는데도 발자국 하나 남겨있지 않은 산길의 정갈함이 정말 좋았다. 나의 산책길도 새롭게 밝아오는 새날에 새롭게 태어났다. 살짝 눈 덮인 산길에 조심조심 내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2봉의 삼각점 표석도 눈이 하얗게 덮여있다. 매일 이곳에 올라 하늘의 북두칠성도 북극성도 샛별도 바라보곤 하는데 하얗게 덮인 그곳에 차마 발을 올려놓지 못하겠다.
아무래도 오늘 새해 첫날 떠오르는 해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흐린 하늘 아래 오솔길만은 유독 정갈해 보인다. 마치 살짝 내린 눈으로 제 모습을 감추고 있는 듯싶다. 하지만 산길은 낙엽에 덮여도, 눈에 덮여도 제 본질은 절대 잊지 않고 있다. 걷는 곳이라는 임무에서 벗어나지 않고 내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내가 지금 시간에 산을 오르는 이유는 첫 해맞이를 하기 위함인데 하늘은 구름으로 장막을 치고 있다. 눈을 내릴까, 장막을 거두고 해를 보일까, 지금 많이 고심하고 있는 듯싶다. 그럼에도 내 걸음수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밝음의 농도도 더욱 짙어지고 있으니 이는 필시 제 임무에 소홀함이 없는 태양의 힘일 것이다. 태양 역시 구름의 장막에 가리어 있다 해도 제 본질을 절대 잊지 않고 있음이다.
우리도 개개인에 따른 본질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나 역시 내 안의 내 본질을 무척이나 아끼며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살아오며 만나는 힘듦과 어려움들이 왜 나에게 왔는가라는 이유에 불복하며 감정을 앞세워 부정하기보단, 깊숙이 내면을 차지하고 있는 나의 본질을 꺼내어 그 일들과 타협을 하며 살아왔다. 그러느라 내 안에 쌓였던 내 본질이 많이 닳아 이젠 바닥에 고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했다.
내 본질이 닳아 없어져 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본연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여 나는 잃은 내 본질을 다소나마 채우며 살아가기를 원했고, 그렇게 자연을 접하고, 책을 읽으며 또 좋은 생각들을 하면서 본질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살아왔음이 사실이다. 좋은 생각들이란 제대로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는 자질을 키우며 나에게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맞이하는 것이었다.
새해 첫날의 아침은 이런 나의 보잘 것 없는 생각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오솔길의 잃지 않는 길의 임무에서, 구름 뒤에서도 빛을 발하며 밝기를 더해주고 있는 태양의 본질을 보여주며 응원을 해주고 있다. 참으로 기쁜 마음이다. 본질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음에, 또는 앞으로도 그러할 수 있음에 용기를 실어주고 있다. 참으로 복된 시간의 첫날 이다.
충만해진 마음으로 발맘발맘 걷는데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났다. 서로 간에 모르는 사이였지만 스치는 순간 우리는 똑같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나누었다. 누구라도 선해질 수 있는 오늘인가보다.
이래저래 해찰을 하던 한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나무 사이로 빛무리진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감사의 마음을 보냈다.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일출을 이렇게 뜻밖에 만날 수 있었으니 내 기도를 들어준 것 같았다. 구름이 양보를 했을까. 아주 약하게 눈발이 날리기도 했는데 어떻게 구름이 거두어 졌을까. 간절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의 믿음을 가지게 해주다니! 부지런히 폰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기쁜 마음으로 반환점에 올라 밑동만 남은 나의 소나무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어제는 어둠으로 그 모습을 담지 못했기에 오늘은 조심스레 그 슬픈 몸짓을 담아 보았다. 나에게 더 높은 목표를 지니며 살아가라 일러준 一聲에, 오늘은 본질을 잃지 말고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받았으니 올 해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리라는 다짐을 하였다.
한 시간여의 산책을 마치고 들어선 아파트 길에는 어느새 경비아저씨께서 대나무빗자루로 정갈하게 눈을 쓸어 놓으셨다. 걸으면서 내면을 다듬을 수 있었던 새해 첫날의 정갈한 시간들에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 삼각점표석
▲ 청미래덩굴 열매로 써본 '신년'
▲ 미명에 잠긴 아파트
▲ 정갈한 오솔길
▲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위에도....
▲ 떠오르는 해
▲ 오롯하게 찍힌 내 발자국
▲ 정갈한 빗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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