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상산 史庫
무주 적상산은 천혜의 요새다. 그 특별함은 역사 뒤안길에서 비켜나지 못하고 의도와 달리 선택의 우선권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고려 말 전략요충지가 되어 쌓은 석성이 지금까지도 전해 옴은 물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양수발전소가 있다.
양수발전소는 상부, 하부의 두 저수지를 이용해 발생되는 수압으로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라고 어설프게 알고 있다. 오래전 견학을 와서 지하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터빈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이곳 적상산에 양수발전소를 만들기 위해 아마도 지금의 상부저수지를 인공적으로 만든 듯싶다. 하여 그곳에 자리한 안국사와 적상산사고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그 과정에 상부저수지까지 자동차길이 생겨났기에 뜻있는 사람들은 역사의 훼손이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안국사를 거쳐 전망대를 향하여 내려오면 상부저수지를 맞바라보는 위치에 적상산사고가 있다. 원래의 위치에서 그대로 옮겨왔다는 건물은 그래도 옛 건물형식을 느낄 수 있는 아담함이 풍긴다. 사각과 선원각으로 이루어진 사고(史庫)는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이 잦은 전쟁으로 소실, 도난당하는 경우가 많음을 우려해 안전한 장소에 보관하기위해 선택된 장소이다. 내가 거쳐 온 안국사는 적상산사고의 수호사찰이었다.
단풍철이 끝나서일까. 史庫 경내는 적막감이 감돈다. 살금살금 들어가 건물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사고보호소라는 작은 간이 건물에서 한 사람이 나온다. 아마도 문화해설원일까. 나이가 지긋하신 분인데 우리 곁으로 다가오면서 설명을 해준다.
조선 후기에 지정된 사고는 5 곳이지만 적상산 사고는 처음부터 5대 사고에 꼽힌 것은 아니었다. 묘향산 실록을 이전한 것이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장서각(서울대)으로 이전했으나 해방 직후 관리 소홀로 도난을 당했다고 한다. 지금 적상산사고에 진열되어 있는 실록은 태백산본의 복사본이라고 한다. 안내원은 관람객이 반가웠는지 우리보고 이층에 올라가서 관람할 수 있다며 안내를 한다.
좁은 계단을 통해 이층에 오르니 실록에 관한 여러 역사적 사실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왕실의 일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적었음은 물론 편찬된 책을 봉안하는 행렬도의 화려함을 보노라니 실록이 그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왕실의 위엄이 어떠했는지가 절로 느껴진다. 각 권, 각 장마다의 글씨는 마치 기계로 찍어낸 듯 정교했으니 그 정성은 가히 하늘에 닿은 듯싶다.
한 면 한 면 조심스레 유리너머 깊은 눈길을 주며 바라보다 나는 그만 한 순간 숨이 멎는 듯싶었다. 아, 그곳에는 조선시대왕의 순서대로 편찬된 실록이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 학교 다닐 때 국사시간에 태. 정. 태. 세. 문. 단. 세... 하면서 외웠던 그 순서대로 2열로 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윗줄 끝 부분과 아랫줄 처음 부분의 두 권의 실록은 여느 왕의 실록과 판이하게 달랐다. 책의 크기도 표지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어쩜! 그 두 권은 연산군과 광해군의 기록이었다. 다른 모든 왕들은 왕이 되어 커다란 책으로 묶여 있었지만, 두 왕은 왕이었지만 왕이 되지 못했던 왕은 君의 칭호로 남아 있었다. 실록이 아닌 일기였다.
아! 역사의 잔혹함이라니!! 끝내 그들의 행실을 왕위에 올려놓지 않았으니… 그들은 지금, 몇 백 년이 흐른 지금도 그렇게 君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제는 그 아무것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잘못된 삶의 흔적들의 평가는 냉엄하기 짝이 없음에 후세인들에게 호기심만을 남겨주었을까.
얼마 전 “광해, 왕이 된 남자” 라는 영화도 광해군 때 사라진 승정원일기 15일 동안의 일들을 상상하며 엮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잘못하고 없어진 것들은 그렇게 누구나가 함부로 상상하며 그 상상에서 빚어진 것들을 사실로 만들어 버리는 것임을… 왜 그랬을까. 왕이 되지 못한 두 君의 마음들을 혼자 헤아려 보려니 먹먹하기만 하다.
사각에서 내려오니 우리를 안내하셨던 분이 경내를 천천히 오가며 걷고 있는데 자꾸 무슨 말을 하고 있다. 누군가와 무전 연락이라도 하는 걸까? 가까이 스치면서 그분을 바라보니 아, 안내문을 들고 혼자 읽고 계셨다. 아니 외우고 계셨던 것이다. 이곳의 역사적 사실을 잘 말 할 수 있기 위하여 그 내용을 외우고 계셨던 것이다. 순전한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해설원이 되신지 얼마 되지 않은가 보다. 과거 역사를 외워 현재를 살아가시는 분! 아, 마음이 울컥해진다!
▲ 史庫에서 바라본 상부저수지
▲ 선원각
▲ 사각
▲ 봉안 : 받들어 모심
▲ 밑에서 올려다 본 상부저수지
멀리 탑있는 곳이 기봉, 왼쪽 봉우리가 향로봉
▲ 적상산 史庫를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심하게 굽이도는 길을 품은 산이 참으로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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